“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어쨌든 그는 ‘나의 아버지’이니까요”


‘아버지’라는 이름만 들어도 유난히 가슴이 저릿해지는 사람이 있다.

영화 ‘마이파더’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인 애런 베이츠.(34)


지난 4일부터 한국을 방문 중인 그의 첫인상은 서글서글한 인상의 넉살좋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시종일관 가벼운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밝게 이끌던 그는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면 저절로 애잔해져가는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나의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주위엔 모두 백인들뿐이었고, 나만 특별히 다르다는 생각도 별로 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부모님의 테두리를 벗어나 대학에 입학하자 생각이 달라졌죠. 학교에 있던 동양인 동아리가 저에게 모임에 가입하길 권유 하더군요”


한국에서 내내 보육원 생활을 하다가 5살 때 미국으로 입양돼 성장한 그는 그 순간 처음으로 자신이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꼈다. 그때부터 막연히 품고 있었던 친부모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뿌리에 대한 호기심이 커져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95년 마침내 그는 군대에 자원했다. 그리고 주둔 지역으로 한국을 선택했다.


“내가 태어난 곳에 대해 알고 싶었어요. 그리고 제 친부모님을 찾고 싶었습니다. 얼마나 걸릴지도 모르는데 일단 한국에서 자리를 잡고 있어야 부모님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TV에서 방영하는 가족 찾기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며 그는 백방으로 부모의 행방을 알아보았다. 어머니는 이미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어느 날 기적같이 아버지를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그러나 기대했던 아버지와의 첫 만남은 교도소에서 이루어졌다.


“2000년 7월, 드디어 아버지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전 그저 아버지가 교도소에 계시다는 말만 듣고 친구와 함께 광주로 내려갔죠. 차에서 내리자마자 전 깜짝 놀랐어요. 기자들이 구름떼같이 모여 있더군요. 그 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사형수라는 사실을 알았어요”


꿈에 그리던 친아버지가 사형수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많이 혼란스러웠다. 한동안 이 상황을 믿기 힘들었다.


“제가 상상했던 아버지와의 만남은 아버지가 저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이 곳은 네가 태어난 곳’, ‘여기는 네가 어릴 적 자란 곳’...이라는 설명을 해주고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죠. 아버지와 걷고 싶고, 아버지를 안고 싶고, 만져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차가운 교도소에서 겨우 5분 정도만 함께 할 수 있다는 현실이 화가 났어요”


‘나의 아버지가 대체 왜?’라는 의문은 끝도 없이 점점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부자지간의 천륜을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는 곧 아무런 조건 없이 사형수 아버지를 그의 ‘진정한 아버지’로 받아들였다.


그는 미국인 양부모와의 사랑과 친아버지와의 사랑을 ‘막대기’에 비유해 설명했다.


“미국 부모님과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함께 했습니다.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기억들이 많고 충분한 유대감이 형성돼있죠. 마치 막대기를 여러 개 겹쳐놓아 절대 부러뜨릴 수 없는 것 처럼요. 친아버지와는 과거에 교감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부러지지 않을 막대기를 지금도 하나씩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는 중입니다. 아버지를 만나면 만날수록 사랑도 커지는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분이 정말 나의 아버지구나’라는 느낌이 절실히 들고요”


미소 짓는 그의 얼굴에서 설핏 서글픔이 비친다.



그는 아직도 어릴 적 한국에서의 기억이 생생하다. 한국과 친부모에 대한 그리움은 그의 무의식 속에 늘 잠재돼 있었다.


“항상 비슷한 꿈을 자주 꿨습니다. 그리고 그 곳은 늘 같은 장소였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곳이 제가 어릴 적에 지냈던 보육원이더라고요. 또 이런 것도 있어요. 사람이 인형 탈을 쓰고 나오는 ‘모여라 꿈동산’ 같은 어린이 프로그램도 꿈에 자주 나왔어요. 그저 단순히 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에서의 기억들이었어요. 그리고 보육원에 있을 때 우리를 돌봐주던 ‘이모’라는 사람들이 세수하면서 ‘푸~’하고 소리를 내던 것도 생생하게 기억나요. 미국에 있을 때 저도 모르게 한동안 그걸 따라하기도 했죠”


그는 본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그의 ‘뿌리’를 늘 그리워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의 ‘뿌리 찾기’는 애런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양부모의 적극적인 지원, 그리고 둘도 없는 친구 김소영 씨의 도움이 컸다고 그는 감사의 말을 전했다.


김소영 씨는 주한 미군 시절 애런 베이츠의 룸메이트로 그가 친아버지를 찾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영화 상에서 배우 김인권이 맡은 역할의 실제 모델이다. 그는 아버지의 편지를 번역해주는 등, 그와 아버지 사이의 언어의 장벽을 넘게 해 준 메신저 역할을 했다.


“소영이가 제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지 한마디로 표현하기는 힘들어요. 정말 이상적인 친구라고 할까요? 그를 만났다는 게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평생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친구입니다”


이 날도 인터뷰 통역을 위해 함께 자리한 김소영 씨는 애런의 칭찬에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싫지는 않은 듯 “진심이냐”고 웃으며 되묻는다.



지난 4일, 애런 베이츠는 양부모님, 친구 김소영 씨와 함께 영화 ‘마이파더’ 시사회를 관람하고 자신을 연기한 배우 다니엘 헤니도 직접 만나보았다.


그는 영화가 끝난 후 양부모님, 김소영 씨와 함께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마지막 면회 장면을 봤을 때 저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습니다. 제가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더군요”


본인을 연기한 다니엘 헤니에 대해서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정말 좋았습니다. 그 당시 저의 감정을 되살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을지 짐작할 수 있었어요. 정확하게 제 감정을 잘 표현했고 완벽한 연기였습니다. 정말 만족합니다”


시사회가 끝난 후 한 관객이 그에게 와서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고맙다고 해야 하는 상황에서 뿌듯함을 느꼈다고 말했다.


“저의 이야기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선사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습니다. 영화를 보시는 모든 분들이 가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됐으면 해요. ‘마이파더’가 주고자 하는 진정한 메시지가 잘 전달되기를 바랍니다”  




 

                                           <인터뷰 현장스케치>


인터뷰,글 /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사진,영상 / 박태양『太陽』<이박고 홈페이지, 싸이미니홈피>
               


Posted by 신효정

새침떼기일 것이다. 도도할 것 같다. 차가워 보인다.

그녀에 대한 편견은 많다.

늘 완벽하고 고운 모습으로 트랜디 드라마같은 삶만을 보여줄 것 같은 그녀, 박시연이 영화 ‘사랑’을 통해 뜨거운 심장을 지닌 강인한 여인으로 변신했다.



“여배우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진한 멜로 영화를 해보고 싶어 할 거예요. 처음 ‘사랑’의 시나리오를 보고 정말 욕심이 났어요. 내가 이 역할을 꼭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하게 들더라고요”


곽경택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주진모, 박시연이 주연한 영화 ‘사랑’은 평생 한 여자만을 사랑하는 한 남자의 치열한 인생을 그린 영화다.


“제가 맡은 미주라는 캐릭터는 어릴 때부터 자기 의지와는 상관없는 많은 인생 역경을 겪는 인물이에요. 오직 평범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만으로 열심히 살지만 그것조차도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비운의 여자죠.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바치는 용기 있는 여자예요”


그녀는 “미주는 어린 시절부터 아픈 것, 상처받은 것들을 내색하지 않고 오히려 더 어른스럽고 태연한 척하는 성숙한 인물”이라고 덧붙였다.


“미주는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것들을 표출하지 않아요. 저 역시도 참았으면 참고 담아두면 담아뒀지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 성격이거든요. 물론, 소심하게 삐치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저랑 비슷한 부분이 참 많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제 삶은 미주처럼 불행하진 않았으면 해요”



주로 가볍고 코믹한 분위기의 전작들에 비해 감정 연기가 중요한 무게 있는 작품은 처음일 터, 아직 연기 경력이 길지 않은 그녀에게 미주라는 역할은 다소 버거운 짐이었을 수도 있다.


실제로 함께 출연한 중견 배우 주현도 처음 박시연의 캐스팅을 두고 “쟤는 사회 경험도 없고 순진한 애가 산전수전 다 겪으며 세상 역경을 이겨내는 미주 역할을 할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표시했다는 후문이다.


“저 역시도 제가 많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감정 연기는 호흡이 중요한데 상대 배우가 아무리 저에게 사랑의 눈빛을 줘도 제가 받아주지 못하면 좋은 장면이 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저희들은 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대화를 많이 했어요. 감독님과 진모 오빠와 셋이서 끝도 없이 술을 마시며 대화하고, 연습하고...그렇게 밤을 새기도 부지기수였어요. 그렇게 하다보니 촬영 막바지엔 서로 눈빛만 봐도 통할 정도로 잘 맞더라고요”



부산을 배경으로 한 이번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대사가 사투리로 진행됐다. 곽경택 감독은 자연스러운 사투리 연기를 위해 촬영 내내 배우들에게 ‘서울말 금지령’을 내렸고, 덕분에 배우들은 사석에서도 극중 인물이 된 듯 사투리로 대화하며 자연스러운 연기를 익힐 수 있었다.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미지의 박시연과 사투리. 얼핏 어울리지 않을 듯 보이지만 박시연은 스스로를 ‘사투리 도사’라 칭한다.


“제 고향이 부산이에요. 부모님도 아직 부산에 사시고요. 그래서 사투리로 연기하는 데 특별한 어려움은 없었어요. 저는 이왕 사투리 쓰는 거, 진짜 토박이들이 하는 말로 쓰고 싶었는데 오히려 감독님이 '그럼 네 이미지 다 망가진다. 적당히 써라'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사투리 이야기를 하며 배시시 웃는 박시연과 이야기를 나눌수록 그녀와 ‘도도함’은 거리가 멀다는 느낌이다. 돌이켜 생각하니 정말 그렇다. 인터뷰 전, 냉면집에서 함께 식사를 할 때 말없이 사람들에게 숟가락과 젓가락을 놓아주던 그녀. ‘예쁘다’는 칭찬에 여배우답지 않게 지나치게 쑥스러워 하며 고개를 숙이던 모습은 오히려 ‘순수함’에 가까워 보였다.


“처음엔 낯을 좀 가리는 성격이거든요. 게다가 애교도 없고 살갑게 굴지도 못하는지라 많이 오해하시는 것 같아요. 전 그냥 무뚝뚝한건데 그런 모습이 도도하거나 새침해 보이나봐요. 예전엔 이런 얘기를 들으면 ‘저 진짜 안 그래요’라고 정색하며 항변하곤 했는데 이제는 굳이 설명하려 하지 않아요. 사람들의 생각을 억지로 바꾸고 싶지도 않고요. ‘시간이 지나면 나의 진짜 모습을 알아주시겠지...’라고 생각하며 넘기게 됐죠”


함께 열연한 주진모 역시 지난 달 기자간담회에서 박시연을 ‘매우 착하고 순수한 여자’라고 평가한 바 있다.


“주진모씨가 저를 그렇게 봐주셨다니 저로선 정말 감사하죠. 사실 진모 오빠와 초반엔 상당히 서먹했거든요. 진모 오빠도 무뚝뚝한 편이라 처음엔 너무 무서워서 겁먹고 말도 못 걸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진모 오빠야말로 겉모습은 무뚝뚝하지만 마음은 순수하고 정말 속이 깊은 ‘진국’이라는 걸 알았죠”


‘사랑’이라는 명제는 박시연에게도 피해갈 수 없는 숙제이다. 영화처럼 치열하고 운명적인 사랑이 그녀에게도 있었을까.


“사랑에 빠진 그 순간엔 모두가 다 그 사랑이 운명적이라고 믿지 않을까요. 하지만 돌이켜보면 그동안 제가 한 사랑은 운명적이고 절절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그냥 예쁘게 했던 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이젠 진정한 나의 소울메이트를 찾을 수 있는 운명적인 사랑은 좋지만 슬퍼지는 사랑은 하기 싫어요”


 


박시연은 감독과 배우들이 이번 작품을 ‘목숨걸고 찍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열정에 넘쳤다고 말한다.


“정말 모든 분들이 열정에 넘쳐서 찍은 작품이에요. 촬영장에서 늘 뜨거운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요. 보통 촬영을 하다보면 가기 싫은 날도 있기 마련인데 저부터도 이번 작품은 ‘오늘은 또 무슨 얘기를 할까’라는 생각에 늘 설렜거든요. 열심히 안하고 요행을 바라는 것 보다는 다들 열심히 했으니까 그만큼 좋은 결과를 기대하고 있어요”


그녀는 이번 영화를 통해 배우로서 조금씩 나아지고 있는 자신을 보여주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개인적으로는 흥행 여부를 떠나 많은 분들이 영화를 보고나서 ‘아...박시연도 이런 영화를 찍을 수 있구나. 이런 역할을 소화해낼 수 있구나’라는 가능성을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한 계단, 한계단, 그렇게 차츰차츰 관객들에게 진정한 배우로 다가갔으면 합니다”


그녀의 바람처럼 박시연이 영화 ‘사랑’을 통해 한국영화계의 또 하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배우로 자리매김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인터뷰 현장스케치 및 네티즌에게 전하는 인사>
 

 

인터뷰/글: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사진/영상: 太陽  http://blog.daum.net/sunny2k


Posted by 신효정

 "레디, 액션!!!”


우렁찬 목소리가 후텁지근한 한여름 밤의 열기를 고조시킨다.

감독의 사인을 받은 배우들의 액션이 분주해진다.


지난 1일 밤, 통영 21세기 조선소에서 진행된 곽경택 감독의 영화 ‘사랑’의 마지막 촬영 현장은 유종의 미를 거두기 위한 감독, 배우, 스텝들의 열정으로 후끈 달아올랐다.


곽경택 감독의 일곱 번째 영화 ‘사랑’은 기존의 곽 감독이 갖고 있는 투박하고 거친 액션에 목숨을 건 뜨거운 사랑이라는 주제를 접목한 감성 액션극이다.


거칠게 살아왔지만 순수한 남자 채인호(주진모 분)는 평생 단 하나 뿐인 사랑 정미주(박시연 분)를 위해 자신의 인생을 건 싸움을 시작한다. 여기에 인호의 운명을 손에 쥔 유 회장(주현 분)과 인호에 대한 복수를 노리는 비열한 악당 치권(김민준 분)이 서로 얽히고 섥히며 치열하고 가슴 찡한 스토리가 전개된다.


이 날 진행된 촬영은 영화의 중반부에 해당되는 내용으로 인호가 부산 건달들을 상대로 펄펄 나는 모습을 본 유 회장이 인호를 눈 여겨 보게 되는 운명적인 장면이다.


촬영 내내 곽 감독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작은 소품과 디테일한 연출까지 신경 쓰는 꼼꼼함을 보였다. 주인공을 맡은 주진모와 주현 역시 맡은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잠시 쉬는 시간에도 감정의 끈을 놓지 않았다. 마지막 촬영인 만큼 조금의 아쉬움도 남기지 않으려는 듯 모두가 열의를 다하는 모습이었다.


 

<곽경택 감독 인터뷰 & 촬영 현장 스케치 >


촬영 현장 공개 후 가진 인터뷰에서 곽경택 감독은 “투박하고 거친 남성적 느낌의 전작들에 비해 ‘사랑’은 나에게 있는 멜로적인 감성을 반영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애수’라는 영화를 보고 며칠 동안을 묘한 감정에 휩싸여 힘들어했던 적도 있었고, 만화 ‘캔디 캔디’를 밤새 읽느라 시험을 망치기도 했었다”며 “나에게도 분명히 그런 정서가 있고, 사랑이라는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 얼마나 치명적인 요소인지 나의 경험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표현하고 싶었다”며 이번 영화를 연출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주인공 채인호 역을 맡은 배우 주진모는 “(장)동건이 형 집에서 밥을 먹다가 우연히 식탁 위에 놓인 ‘사랑’의 시나리오를 보고 단숨에 빠져들어 장동건을 졸랐다”며 “‘이 영화가 바로 내 인연이다’라는 느낌이 왔고 캐스팅 됐을 때의 기쁨의 정도는 그 동안의 작품들 보다 10배 이상은 되었다 ”고 영화에 대한 아낌없는 애정을 드러냈다.






<주진모 인터뷰>

 


유 회장 역의 주현 역시 “내가 딱 하고 싶었던 역할”이라며 배역에 대한 만족감을 나타냈다. 그는 “늘 말론 브란도나 알 파치노 같은 외국 배우들을 보며 나이를 먹었어도 저런 멋진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기회에 그런 배역과 상당히 근사한 캐릭터를 맡아서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인터뷰 내내 곽경택 감독과 주연 배우들의 얼굴에서는 영화에 대한 자신감과 당당함이 넘쳤다. 감독과 배우, 모두에게 새로운 변신의 계기가 될 영화 ‘사랑’이 관객들에게는 어떤 평가를 받을 것인지 그 결과가 주목된다.


영화 ‘사랑’은 올 추석 개봉 예정이다.














    글    :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사진&영상 : 『태양』(이박고 홈페이지, 싸이미니홈피)

Posted by 신효정

얼마 전 다음 TV팟에 '교생 실습을 마치며 아이들에게'라는 제목의 UCC 동영상이 올라왔다.


지난 4월, 한 달 간 중학교 아이들을 상대로 교생 실습을 했던 한 대학생이 이별을 앞두고 아이들에 대한 애뜻한 마음을 랩으로 담은 영상이었다. 직접 작사한 가사에 리듬을 붙여 만든 이 동영상은 현재 6만 5천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정말 멋지다', '이 열정을 끝까지 간직하길 바란다'는 네티즌들의 뜨거운 반응과 격려를 얻고 있다.


(화제의 TV팟 동영상 보러가기->http://tvpot.daum.net/theme/ThemeView.do?themeid=130 )




<화제의 동영상 주인공 김현민 씨>


짧지만 아이들을 향한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는 동영상 속 인물을 직접 만나기 위해 25일, 그가 다니는 상명대학교를 찾았다. 화제의 주인공은 현재 국어교육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김현민(25) 씨.


"이런 걸로 인터뷰까지 하게 되다니...쑥스럽고, 긴장되네요"


멋적게 웃으며 수줍어하는 그의 첫 인상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 하지만 교생 실습 시절의 학생들 이야기가 나오자 어느 새 의젓하고도 당당한 '선생님'으로 돌변하는 그다.



장기 살린 감동의 랩 UCC



"홍은중학교에서 1학년 국어과목 교생을 맡았었어요. 한 달 동안 느낀 점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고마웠고 정도 많이 들어서 헤어지기 정말 아쉬웠죠.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랩으로 UCC를 만들게 된거예요. 저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평생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고등학교 때부터 힙합과 흑인음악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는 친구들끼리 모여 가사도 쓰고 클럽을 빌려 공연도 하곤 했다. 동영상 속 랩 가사를 30분도 안 걸려 금세 만들어 낼 정도의 실력자이기도 하다.


"랩은 노래보다 한 곡 안에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아서 좋은 것 같아요. 아직도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많은데 다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서 좀 아쉬워요"


동영상을 본 아이들은 선생님의 깜짝 선물에 감동을 받았다며 '선생님 고마워요' '선생님 사랑해요' 라는 메시지들을 보내왔다.


"사실 저는 학창시절에 교생 선생님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어요. 하지만 제가 가르친 아이들에게는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을 선사해준 것 같아서 정말 뿌듯해요"




아이들이 선사한 소중한 기억


물론, 처음부터 친해질 순 없었다. 조금은 어색했던 첫 만남. 중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은 처음 맞이하는 교생 선생님을 보고 신기해하며 수근거렸지만 정작 먼저 다가오지는 않았다.


"제가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로 했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학교 생활 얘기, 좋아하는 연예인 얘기, 재미있게 본 영화 얘기 같은 걸 하면서요. 그렇게 먼저 다가가니까 아이들도 금세 마음을 열더라고요"


교생 실습 동안 그의 열정은 남달랐다. 정식 출근 시간은 8시 20분이었지만 그는 늘 6시 반까지 학교에 도착해 자신이 맡은 학급 뿐 아니라 다른 학급들도 돌아보고 일찍 등교한 아이들의 말벗도 되어주었다.


"밝게 웃어주고, 인사하고, 반겨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요즘 애들 이렇다 저렇다 얘기도 많지만 제가 봤을 때 아이들은 굉장히 순수하고 착해요. 단지 표현하는 법이 서툴러서 그렇지 본성은 때묻지 않은 그냥 아이들이에요"


그는 교생을 하면서 교사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심'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아이들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교생 선생님은 어차피 한 달만 있다가 가는데 친해지면 뭐하나, 애정은 줘서 뭐하나' 이렇게 생각했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가 진심으로 자기들을 아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고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진심이 전달된 것 같아서 울컥했죠"


교생 실습 마지막 날, 그와 아이들은 서로의 '진심'을 전달했다.


"아이들이 저를 위한 깜짝 이벤트를 마련했더라고요. 교실을 풍선으로 예쁘게 꾸미고, 초코파이로 케잌도 만들어주고, 편지도 주고요. 정이 넘치는 아이들이죠. 정말 눈물나게 고마웠어요. 저도 답례로 짱구가 그려진 귀여운 캐릭터 양말을 한 켤레씩 선물했는데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아이들이 김현민 씨에게 준 편지와 그림들>

그가 아이들에게 준 선물은 양말 뿐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랩과 춤을 준비했는데, 사실 춤은 추기 좀 힘들었어요. 제가 선천적으로 심장병이 있거든요. 다섯 살 때 대수술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건강이 안좋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추었다. 아이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어릴 적부터 심장병이 있었고 몸이 약했지만 난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해서 랩 공연도 하고, 농활도 다녀오고, 여러가지 활동을 하면서 내 인생을 만들어 나갔어. 너희들은 나보다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 많이 부딪쳐보면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길 바래'





<아이들과 함께한 소중한 순간들>



사랑으로 가르치는 진정한 선생님 되고파


왠지 모를 묘한 감정에 휩싸여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도 있었다.


"저희 반 남자아이 중 하나가 저에게 자기의 꿈도 선생님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처음 선생님의 꿈을 품은 게 중학교 1학년 때였거든요. 기분이 묘하면서 뭉클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 아이에게서 선생님을 꿈꾸던 어린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그 꿈, 꼭 이루라고 했죠. 저의 격려가 그 아이에게 힘이 되고 또, 훗날 그 아이가 뭉클한 마음으로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교생 실습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은 아이들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선생님이 되고싶다는 그의 꿈에 대한 '확신'이었다.


"전 아이들이 정말 좋아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요즘 아이들은 나쁘지 않아요. 단지 속마음을 능숙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 뿐이죠. 그런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돼서 많은 사랑을 주고 싶었지만 '내가 교사가 될 수 있을까', '과연 교사가 내길일까'라는 의구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교생 실습을 통해서 그런 고민들이 확 날아갔어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저에겐 가장 소중하고 행복했거든요. '내가 갈 길은 이 길이다'라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제 꿈에 대한 확신을 준 아이들에게 더 고마워요"


그는 단순히 수업만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닌,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선생님이라는 역할은 수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아이들 생활 지도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닌, 아이들의 인생에 밝은 빛이 돼 줄 수 있는 진정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제가 예전에 쓴 랩의 가사 중에 '교실이란 클럽안에/ 교단이란 무대위에/ 학생이란 관객앞에/수업이란 공연을해' 라는 구절이 있어요. 그게 제 인생의 목표랍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꼭 학생이라는 관객 앞에서 아주 멋진 공연을 하고 싶어요.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할 거예요"




아이들에게 전하는 랩을 부탁하자 5분 여 만에 두 개의 랩을 즉석에서 만들어 내는 김현민 씨입니다.^^



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Posted by 신효정

'일본의 국민배우'

'카리스마의 상징'

'헐리우드가 인정한 배우'


배우 와타나베 켄(48)을 표현하는 수식어들이다.


'라스트 사무라이'에서 탐 크루즈와 함께 초원을 누비던 용맹한 무사, '배트맨 비긴즈'의 화려한 무술의 달인, '게이샤의 추억'의 중후한 재력가인 체어맨까지. 강렬하고 선 굵은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그가 평범한 가장의 모습으로 한국을 찾았다.


                                                               [사진= 하정임]


오가와라 히로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내일의 기억'은 평범한 샐러리맨이 어느 날 갑자기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며 겪는 고통과 갈등, 그리고 따뜻한 가족애를 그린 작품으로 와타나베 켄이 단독 주연으로 열연했다.


그동안 비범하고 카리스마 있는 역할을 주로 맡아왔다면, 이번 영화에선 예고 없이 찾아온 병 앞에서 한없이 나약해지고 눈물도 흘리는 평범한 우리네 모습을 섬세하고 자연스럽게 표현했다는 평이다.


23일, 영화 '내일의 기억' 홍보차 내한한 그를 만나 영화와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다양한 매력 지닌 '천생 배우'


                                                                   [사진=하정임]


강렬함. 역시 그랬다. 그 동안의 작품에서 보았던 예의 카리스마 넘치는 그 눈빛, 그대로였다. 그러나 눈이 마주치자 금세 부드럽고 환한 미소를 띠며 정겹게 악수를 청하는 그다.


"한국을 방문한 건 이번이 처음입니다. 하지만 제 장모님이 고향이 부산인 한국분이라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어 친근한 이미지를 갖고 있어요. 또 제가 좋아하는 감독, 배우가 많은 곳이라 더 각별한 느낌이 들고요. 이렇게 가까운데 그 동안 못 와봤다니...앞으로는 자주 와야겠네요"


첫 한국방문에 대한 소감으로 운을 뗀 그는 인터뷰 중간중간 가벼운 농담도 던지며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하지만  연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만큼은 시종일관 매우 진지한 모습이었다.


"시나리오를 읽는 순간, '이거다' 싶었어요. 그동안 스케일이 큰 영화에서 강인한 배역만을 해와서 그런지 지금의 나와 같은 선에서 같은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역할을 맡고 싶었죠. 일에 있어 완벽함을 추구하느라 가정을 등한시했던 한 가장이 알츠하이머 선고를 받고 가족과 인생의 의미를 깨달아가는 캐릭터도 매우 끌렸고요"


                                                               [사진=하정임]


기억을 점차 잃어가는 알츠하이머 환자를 연기하는 과정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그는 보다 현실적이고 리얼한 연기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말한다.


"알츠하이머와 관련된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나봤습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물론, 실제로 투병 중인 환자와 가족, 동료들을 만났고 그들의 삶을 직접 체험해 보며 철저한 조사를 거쳤어요. 서서히 기억을 잃어가는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시간의 흐름에 맞춰 한달 반 동안 체중도 8kg을 줄였고요.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사람들이 알츠하이머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도록 하고, 실제 병을 앓는 환자와 가족들이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두려움 보다는 극복할 의지와 희망을 느끼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힘든 과정이었지만 "연기를 위해 고민하는 작업조차 즐겁다"고 말하는 그는 천생 배우였다.



'내일의 기억', 나의 이야기


                                                                 [사진=하정임]


사실 이번 영화에 쏟는 그의 애정은 남다르다. 17년 전에 받은 백혈병 선고. 배우로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그는 당시 주연을 맡았던 영화도, 그 밖의 다른 일들도, 모두 포기해야 했다. 그 역시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던 아픔을 겪었기에 이번 작품의 배역에 더욱 공감하며 몰입할 수 있었고, 이전의 그 어떤 영화보다 커다란 보람과 성취감을 맛보았다.


그는 이번 영화를 찍으며 새삼 깨달은 것이 많다고 남다른 소감을 밝혔다.


"다행히 치료가 돼서 다시 활동할 수 있게 됐지만 당시엔 배우로서, 백혈병에 걸려 투병한다는 사실이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해서 감추려고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영화를 찍으며 알게 됐어요. 그 때의 난, 내가 느끼는 고통과 괴로움을 타인에게 알리고, 도움을 청하고 싶어 했었다는 것을요. 영화 속에서도 충격을 받은 주인공이 가족과 동료들에게 병을 숨기려고 애씁니다. 하지만 곧 발각되고 그들의 따뜻한 애정으로 조금씩 삶의 의미를 찾게 되죠"


그는 병으로 인한 죽음과 끔찍한 고통 따위의 극적인 설정보다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지극히 현실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말했다.


"병에 걸려도 여전히 배가 고프면 밥을 먹죠. 졸리면 잠을 자고요. 환자와 가족들에게 닥친 그저 현실적인 일상을 담고 싶었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요. 저 역시 비슷한 상황을 겪어봐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짧은 순간, 그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한다.



인생과 가족의 참의미 말하고파


                                                                 [사진=하정임]


'내일의 기억'은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한국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와 비교되기도 한다.  그러나 '내 머리 속의 지우개'가 20대의 불같은 사랑을 그린 연애영화라면, '내일의 기억'은 오랜 세월을 함께한 중년 부부의 따뜻한 동지애를 느낄 수 있는 가족영화에 가깝다.


"한마디로 우리의 인생과 가족에 대해 말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엔 사무라이도, 게이샤도 나오지 않습니다. 닌자나 도깨비도 등장하지 않죠. 여러분과 똑같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비록 나라와 언어는 다를지라도 사람이 살면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은 같다고 봅니다. 인생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가족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많은 분들과 함께 공감하고 싶습니다"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진심어린 그의 표정에서 영화에 대한 자부심과 확신을 읽을 수 있었다. 그의 진솔한 연기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의 메시지를 선사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Posted by 신효정

이런 소식을 전해드리게 되어 정말 마음이 무겁네요.

 

올 4월에 제가 쓴 기사

'노부부의 아름다운 동행'의 주인공인 정성균 할아버지와 손난심 할머니.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과 함께 귀감이 되어주셨는데요..

 

 

http://blogbbs1.media.daum.net/griffin/do/blognews/etc/read?bbsId=B0008&articleId=2922

 

->(당시 기사 바로보기입니다)

 

 

 

지난 12월 1일 끝내 할머니께서 하늘나라로 가셨다고 합니다.

 

꾸준히 연락을 해오다 두 분을 마지막으로 뵌 것이 지난 초가을 쯤이었습니다.

양주시에 거주하시던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인천으로 이사를 가시기 전 날이었죠.

 

이사 가신 후 근황이 궁금해 엊그제 오랜만에 연락을 드렸더니

할아버지께서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비보를 전해주셨습니다.

이미 화장과 장례식도 마친 상태로, 할아버지는 홀로 몸과 마음을 추스리고 계셨습니다.

 

마음이 먹먹하고 좀 더 일찍 전화드리지 못한 것이 죄스럽기만 합니다.

 

기사가 나간 후 방송사들의 빗발치는 섭외 요청에도 미디어다음 기사에 달아주신 네티즌 여러분들의 많은 격려 댓글에(할아버지께서 인터넷을 못하시는 관계로 기사와 댓글을 모두 프린트해서 드렸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여한이 없다'며 모든 인터뷰와 방송출연을 거절하신 할아버지, 할머니.

 

마지막으로 뵌 날, 생딸기 주스를 할머니께 먹여주시던 할아버지.

저에게 연신 고맙다고 하시던 할머니.

마지막으로 본 두 분의 다정했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의외로 담담한 목소리의 할아버지....하지만 사고 후, 23년간 쭉 돌봐온 아내의 죽음.

그 심정을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요.

할아버지 힘내시고 남은 생 편안하고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생에 두 분 다시 꼭 부부로 만나 못다한 연을 나누시기를...

 

故손난심 할머니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by 신효정
 

‘노부부의 아름다운 동행’


<전신마비 아내 23년째 돌보는 정성균 할아버지>


얼마 전 전신마비의 아내를 23년 동안 한결같이 돌보고 있다는 한 할아버지에 대한 제보를 받았다.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정성스러운 간병으로 할아버지는 이미 동네에서는 유명인사라고 했다.

짤막하게 전해들은 사연이었지만 왠지 꼭 한 번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봄기운이 완연했던 지난 4월 5일, 마침내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정성균(69) 할아버지 , 손난심(66) 할머니 댁을 찾았다.

문이 열리자 할아버지께서 반갑게 맞아주신다.

아담하고도 잘 정돈된 집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어주시자 마자 할아버지가 다시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가신다.

마침 할머니를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기고 계시는 중이었는지 힘겹게 휠체어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점퍼를 입히고 , 두꺼운 덧버선을 몇 겹씩 신겨드렸다.

춥지 않도록 목에도 정성스럽게 스카프를 둘러주시고 몸에 연결된 소변팩도 휠체어 옆으로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팔과 어깨, 다리를 연신 주물러주신 후에야 힘겨운 한숨을 후-뱉으신다.


“이제 됐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차라도 한 잔 대접해드려야지...”

 






할아버지께서 커피를 준비하고 계신 동안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안 추우세요?”

 

다소 더운 듯한 날씨라 반소매 차림으로 실내에 들어선 기자를 보고 할머니께서 희미한 목소리로 처음 꺼내신 말이다.


“오늘 밖의 날씨 엄청 따뜻한걸요^^”


“난 너무 추운데....항상 추워서...집안에서도 이렇게 두껍게 입고 있어야 해....”



곧, 깔끔한 컵에 커피 두 잔을 내어 오신 할아버지는 인터뷰 중에도 할머니에게 내내 신경이 쓰이시는지 좀처럼 할머니께 시선을 떼지 못하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1984년 10월 22일, 내가 날짜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해요. 아내에게 사고가 났던 날 말이에요”


당시 40대 중년이었던 할머니는 김장을 담글 재료를 구하기 위해 친구 분들과 춘천으로 가던 길에 사고를 당했다.

청평댐을 건너던 중 차가 마주오던 트럭과의 충돌을 피한다는 것이 그만 강물로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동승했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고 마침 지나가던 고기잡이배에 할머니만이 유일하게 구조됐다. 

그야말로 ‘구사일생’인 셈이었다.



 

“새벽 2시에야 연락을 받았어요.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글쎄 머리는 빡빡 다 깎여있고...눈은 토끼 눈처럼 빨갛게 충혈 돼서...몸은 물을 먹어 엄청나게 부어있고 말야....”


애써 담담한 말투로 당시를 회상하는 할아버지는 목이 메는 듯 잠시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그때부터 부부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졌다.

할머니는 중환자실에서 8개월, 일반 병동에서 1년 2개월의 길고긴 투병 생활을 해야 했고 할아버지는 하던 사업도 접고 아내의 간병에 매진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것은 절망적인 전신마비 판정이었다.


“그때까지는 전신마비라니..상상도 못했지. 그저 치료 잘 받으면 나아질 줄만 알았어요....얼굴과 목을 제외하고는 그 밑으로는 전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감각도 없다고 하는데....정말 앞이 깜깜하더라고요”


한 동안 끔찍한 고통과 절망의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한 번은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열흘 동안 홀로 사라져버린 적도 있었다.

“그 때는 내가 내가 아니었어요...정말 내 생을 포기하려는 그런 심정이었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갈등을 하고...아마 그 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할아버지를 붙잡아 준 것은 ‘부부의 연’이라는 단단한 줄이었다.


“아내와 결혼하던 순간을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부부 서약에 이런 구절이 있잖아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한결같이 사랑하겠노라고...그 서약을 떠올려보니 나 혼자 잘살아봤자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한 번 맺은 부부의 연인데...끝까지 내가 짊어지고 갈 운명이라고 받아들였죠. 그렇게 아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어느 새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사고 전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


   <사고가 난 지 약 10여 년 후에 부부가 함께찍은 사진. 이도 벌써 10년이 넘은 사진이 되었다 >

 


매일 아침 아내를 관장해주는 일부터 시작하여 씻기고, 식사를 준비해서 먹여주고,

근육이완제와 변비약을 시간 맞춰 먹이고,  책을 시키고,

근육 경직 때문에 수시로 온 몸을 주물러주고,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두 시간마다 몸의 위치를 바꿔줘야만 하는 일은 이제 할아버지에게는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

때문에 밤에도 단잠을 자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이다.


    < 커다란 달력에는 할머니를 위한 간병 일지가 꼼꼼하게 적혀있다>

 

 

힘들지 않으시냐는 물음에 오히려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당뇨가 있거든...그래서 운동을 좀 해줘야 좋다는데 아내 덕분에 나도 열심히 몸 움직이고 운동해서 건강해진다고 생각해요. 짜증내면 한도 끝도 없는 건데...내 건강을 위해서 움직이게 해준다고 바꿔서 생각하면 아내에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예요?


    <인터뷰 중에도 시종일관 할머니를 챙기시고 경직된 몸을 주물러주는데 여념이 없다>


이런 할아버지이기에 주위에서는 ‘천사’로 불리지만 정작 할아버지 본인은 ‘부담스럽다’고 손사래를 치신다.


“부부간에 한 쪽이 아프면 당연히 간병하는 거지 뭐가 대단하다고...젊어서 고생만 시킨 아내인데 내가 당연히 돌봐야죠. 만일 내가 다쳤다면 아내도 나에게 이렇게 했을 거예요”


이쯤 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만남과 연애시절이 궁금해졌다.


“어릴 적에 시골 한 동네에서 자랐어요. 당시 난 고등학생이었고 아내는 중학교 3학년이었지. 내 여동생의 선배였는데 집에 자주 놀러오곤 해서 내가 수학도 가르쳐주고 하면서 정이 들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동생으로만 생각했는데...어느 순간 참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참...그 땐 정말 예뻤지....물론, 지금도 예쁘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할아버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흘렀다.

분위기를 조금 밝게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가장 기뻤던 순간을 여쭤보자 자녀들이 결혼하던 순간을 꼽으셨다.


“아내의 이 불편한 몸으로도 4남매 중 3명을 모두 출가시켰어요. 그 순간이 제일 기뻤던 것 같아요. 아이들도 고생 많이 했거든요. 큰 딸은 다니던 대학까지 그만두어야 했고요..그게 항상 미안했는데 다행히 다들 좋은 배우자 만나 출가하여 자리 잡았으니 기쁘죠. 이제 하나 남은 막내만 장가가면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불편한 몸으로도 할머니는 4남매 중 3자녀를 모두 출가시켰다 >


자식들 이야기를 하시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행복해보였다.

지금 행복하시냐는 물음에도 역시 주저 없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주위에 출세한 사람들도 많죠. 그런데 난 이렇게 사는 게 지금 정말 행복해. 명예나 권력이 없어도 우리 부부 함께 있다는 것, 그래서 서로 의지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해요. 더 뭘 바라겠어요. 고통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니까 된 거예요. 사랑 없이 사람이 살 수 있나? 우리 부부 남은 생 실컷 사랑하다가 죽는 날까지 함께 가는 게 저의 작은 소망입니다”


 

   <"두 분 사진 좀 찍을께요"라는 기자의 주문에 할머니의 머리부터 곱게 빗겨주시는 할아버지>

   <조금만 웃어달라는 주문에 할머니께선 힘드신 와중에도 엷은 미소를 지어주신다>


    <두분 산책 나가시기 직전에 한 컷^^>


<매일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산책시키는 일 역시 일과 중 하나>



   <바깥에 나오니 조금 기분이 좋아지신 듯 보이죠?^^>

<산책하러 나오면 동네 단골 분식점에서 김밥과 잔치국수 드시는 걸 좋아하신다는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지금처럼 두분 사랑 변함없이 오래도록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Posted by 신효정

사할린동포 독거노인 위한 ‘끝이 없는 봉사’

5년째 사비 털어 김장 담가주고 무료장례 130번 치러준 장례식장 주인
본인은 월세 30만원짜리 ‘사글세 삶’…“삶 자체 봉사인 사람” 평가

미디어다음 / 글, 사진=신효정 프리랜서 기자


매서운 초겨울 바람이 불던 지난 16일.

경기도 안산의 한 공원에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아주머니 50여 명이 모여들었다.

공원 한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들은 배추, 무, 고춧가루 등. 김장을 담그기 위한 재료들이다.

이는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열린 ‘사할린 동포 돕기 김장행사’의 모습. 그런데 김치 담그기에 여념이 없는 아주머니들 사이에 하얀 ‘주방장 모자’를 쓴 한 남성이 보인다.


지난 16일 경기도 안산의 한 공원에 ‘사할린 동포 돕기 김장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그는 사할린동포후원회 회장 오창석(58) 씨다. 오 씨는 올해로 다섯 번째 ‘사할린 동포 돕기 김장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올해 김치 담그기 행사에서는 모두 9000포기의 김장을 했다. 3일씩 세 번에 걸쳐 모두 9일간 이 많은 양의 김치를 담갔다.

동원된 인력은 100여 명. 안산의 새마을부녀회와 참봉사단이 일손을 거들었다.

이 ‘사랑의 김치’는 안산의 고향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 동포 489세대에 가구당 20kg씩 나눠줄 예정이다. 그리고 인근 고아원과 양로원 아홉 곳에도 300~500kg씩 제공된다.

배추 9000포기는 모두 오 씨가 손수 농사를 지은 것이다. 농약 한 번 치지 않은 순수 무공해 배추다. 최근 ‘기생충 알 김치’ 파동 때 배추 값이 급등하자 배추를 훔쳐가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로 귀한 배추다.

이처럼 대대적인 김치 담그기 행사를 하기 위해 든 비용은 모두 합해 6000만 원 정도. 이 비용은 오 씨가 사비를 털어 마련한 것이다.

오 씨는 “먼 사할린 땅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고국에 돌아온 동포 노인들이 한국에서도 외롭게 여생을 보내고 있다”며 “사할린 동포 노인들이 내가 담근 김치로 밥 한 끼를 맛있게 들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할린 동포 돕기 김장행사’에서 많은 아주머니들이 김치를 담그고 있다.
안산 고향마을은 사할린 동포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70세 이상의 노인들로, 일제강점기 때 러시아로 강제 징용됐던 이들이다.

이들은 일생의 대부분을 사할린에서 보내고, 2000년 2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착한 곳이 이곳 고향마을. 처음에는 971명이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841명만이 남았다. 그동안 130명이 눈을 감았다.

오 씨가 사할린 동포 노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바로 이들 130명의 죽음이었다. 안산에서 장례식장을 운영하고 있는 오 씨에게 피붙이 하나 없는 동포 노인들의 외로운 죽음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사할린 동포 노인들은 장례식은커녕 수의조차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를 보다 못한 오 씨는 이들을 위해 무료 장례를 치러주기 시작했다. 노인들에게 수입을 입혀주고 직접 염을 했다. 외로운 노인들에게 자식 노릇을 한 셈이다.

오 씨는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다가 막상 한국에 온 지 한두 달 만에 고인이 되는 분들을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며 “조금이나마 마지막 가는 길을 돕고자 하다 보니 장례를 치러주게 됐다”고 말했다.

이같이 결코 적다고는 말할 수 없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오 씨는 종종 주위에서 돈이 무척 많아 그 돈을 기부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오 씨의 형편은 넉넉지 않다. 그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인 집에서 아내와 자녀 4명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늘 하얀 고무신만 신고 다닐 정도로 가난에 익숙하다.

이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오 씨가 남을 돕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은 것은 ‘1만 원이 생기면 1만 1000원을 봉사하는 데 써야 한다’는 그 자신의 고집, 또는 철학 때문이라고 한다.


사할린 동포를 돕기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오창석 씨. 16일 그는 동포 노인들을 위한 김장을 하기 위해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바쁘게 일했다.
오 씨는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 씨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사망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를 한국에 버려둔 채 일본으로 떠났다.

어린 나이에 홀로 한국에 남게 된 오 씨는 거지, 건달, 노숙자 생활을 하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간신히 유년시절과 성장기를 보냈다.

당연히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오 씨의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 중퇴다. 그는 “어렸을 때 힘든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어려운 이웃들이 남 같지 않다”며 “배고파 본 사람이 배고픈 사람 심정을 더 잘 아는 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사할린 동포들을 돕기 전에도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해왔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두고 “삶 자체가 봉사인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다.

오 씨는 무의탁 노인을 위한 시설을 운영하기도 했었고, 음성 꽃동네에 수년 동안 모두 900여 벌의 수의를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지난 97년에는 신장 질환을 앓고 있던 생면부지의 고등학생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해 한 생명을 살렸다. 오 씨는 또 장기기증운동본부에 간과 골수를 기증하겠다는 신청도 해 놓은 상태다.

이런 오 씨의 삶을 지켜보는 가족의 마음은 편할 날이 없다. 오 씨의 장녀 영미(29) 씨는 “솔직히 불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라면서 “아버지 자신도 힘들 텐데 남의 일까지 다 떠안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속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영미 씨는 “그렇지만 아버지의 봉사하는 삶을 보면서 가족들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됐다”며 “지금은 가족 모두 아버지의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 씨는 최근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사할린동포후원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후원회를 사단법인화 해야 정부에 더 강력하게 사할린 동포 지원 정책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씨는 “아직까지 사할린 동포를 지원하는 제도가 없어 동포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지금 사할린 동포를 지원하는 법안이 국회에 상정된 상태인데 꼭 통과돼서 사할린 동포 지원 대책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도 아픈 과거를 딛고 고향 땅을 찾은 사할린 동포를 돕는 후원회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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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Posted by 신효정
재소자에게 보낸 수천 통 편지…“결국 나를 변하게 해”
8년째 감옥으로 편지 쓰는 사람 강지원 인터뷰, “편견 버리고 그들을 바라보세요”
미디어다음 / 신효정 프리랜서 기자
“재소자들도 알고 보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편견을 버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봤으면 합니다.”

지난주 미디어다음과 만난 ‘편지 쓰는 사람들’(편쓰사, www.letterpeoples.com) 대표 강지원(37, 여, 사진) 씨는 재소자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편견이 섭섭한 듯 이같이 말했다.

언뜻 연약해 보이는 몸에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강 씨지만 사람들이 재소자들에게 근거 없는 오해를 품고 있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이처럼 강 씨는 재소자들을 ‘편애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도 그럴 만했다. 강 씨가 재소자들을 벗 삼아 보낸 시간이 어느덧 8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강 씨와 재소자들을 이어준 다리는 한 장의 편지. 강 씨가 교도소 담장 너머로 띄워 보낸 편지의 수는 강 씨 자신조차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아마 수천 통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편지 때문에 재소자와 함께 웃고 울어본 때도 수십 차례다. 이같이 재소자들과 남다른 인연을 맺으며 살아왔지만 사실 그 시작이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았다고 강 씨는 말한다.

재소자와 이어준 다리, 한 장의 편지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삶으로…
올해 초 한 재소자가 ‘편쓰사’ 회원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편지지 30장을 이어 붙였다. 당시 재소자는 하루에 세 통밖에 편지를 쓸 수 없는 교도소 내부 규칙이 사라지자 기쁜 마음에 긴 편지를 썼다고 한다. [사진=편쓰사]
“1998년부터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졌어요. 그러다보니 자주 누워있게 됐고,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죠. 그러다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결심을 했어요.”

지금과는 다른 삶. 강 씨에게 그것은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타인을 함께 보듬는 삶을 의미했다.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삶으로, 강 씨는 번쩍 자신의 삶을 ‘들어’ 옮겼다.

이런 강 씨가 외로운 사람들에게 편지 쓰는 일을 자신의 일로 택한 것은 그야말로 강 씨다운 결정이었다. 그는 이 일이 여러 봉사활동 중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편지 쓰기라면 자신의 적성과 꼭 맞는 일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과감하게 강 씨는 자신의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한 잡지에 ‘편지를 보내드립니다’라는 ‘이상한’ 광고를 냈다.

“물질적으로 하는 봉사보다도 마음이 외롭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잡지에 광고를 냈는데, 의외로 재소자 분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죠.”

물론 강 씨에게도 처음 재소자에게 편지를 보낼 때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이 사람에게 어떻게 들릴까. 과연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이 사람들도 공감할까.”

하지만 다 기우였다. 편지를 주고받으면 주고받을수록 강 씨는 재소자들도 모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며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이런 평범한 진실을 깨달아가는 동안 강 씨에게 배달돼 오는 편지는 점점 늘어만 갔다. 어느덧 재소자 100여 명이 강 씨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재소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기우였을 뿐
함께 편지 쓸 사람들 모았지만 재소자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
‘편지 쓰는 사람들’ 홈페이지 화면. [www.letterpeoples.com]
“아무래도 혼자서는 100여 명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낼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함께 재소자에게 편지를 쓸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이게 훗날 편쓰사가 됐죠.”

편쓰사의 모든 편지는 개인 주소가 공개되지 않고 사서함만을 통해 전달된다. 편지를 보내는 횟수는 각자 사정에 따라 조절된다. 대개 회원 한 명이 재소자 2명 이상과 연결돼 한 달에 2회 정도 편지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강 씨는 “이 정도 횟수로 편지를 써서는 재소자들의 편지에 원활하게 답장을 하며 모임을 운영해 나가기 힘들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또 회원 수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한다.

편쓰사의 회원 수는 99년 당시 700여 명이었으나 요즘은 20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강 씨는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자필로 편지를 쓰는 것을 귀찮아하는 탓에 회원 수가 줄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강 씨는 그러나 재소자들의 편지는 나날이 늘어나고만 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재소자들한테서 편지가 많이 올 때는 한 달에 수천 통까지 온다고 한다.

강 씨는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만, 함께 변해가지 못하는 교도소 담장 너머의 재소자들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또 일일이 답장을 쓸 수도 없는 형편에 재소자들의 외로움만 더 짙게 느껴져 항상 마음이 무겁다.

세상은 변하지만, 함께 변해가지 못하는 재소자들
누군가 관심 가져준다는 안도감이 재소자 변하게 하는 원동력
“간절히 편지를 기다리는 재소자 분들께는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편쓰사 회원들이 일상생활도 포기해가며 편지만 쓰는데도 답장을 못 받는 재소자 분들이 대다수니 정말 안타까워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7살과 5살짜리 어린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강 씨에게 육아와 일상생활, 편지 쓰는 일을 병행하는 것은 때때로 버겁게 느껴진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지칠 때는 이 일을 시작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후회를 한 번도 안 해봤다면 거짓말이겠죠. 하루 종일 편지 쓰는 일에만 매달려야 할 때도 많았으니까요. 정말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강 씨가 결코 이 일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간절히 편지를 기다리는 재소자들이 편지를 받았을 때 느낄 기쁨과 희망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딘가에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있다는 안도감. 이런 작은 안도감이 재소자들로 하여금 꾸준히 자신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게 강 씨의 신념이다.

“입버릇처럼 사는 게 고통스럽다고 하던 한 재소자가 어느 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편지를 보내왔어요. 앞으로 더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도 하면서요. 순간 더 열심히 편지를 써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죠.”

강 씨는 요즘 앞으로 활동의 범위를 넓혀 재소자들이 출소 뒤에도 재범을 저지르지 않고 사회에 잘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적인 재활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재소자들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결국 재소자들을 하나둘 변화시켰듯이,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삶으로 번쩍 자신을 ‘들어’ 옮긴 뒤 강 씨 자신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 한 재소자가 ‘편쓰사’ 회원에게 보낸 편지. 이 재소자는 폭력죄로 10년 넘게 수감 생활을 한 뒤 사회로 복귀해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10년 넘는 수감생활을 마치고 사회에서 힘겨운 적응기간을 거치고 있는 한 친구가 오랜만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작은 아파트에서 연고도 없는 소년원 출신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침마다 자신은 정비기술 학원에 가고, 아이들은 검정고시 학원에 보내느라 정신이 없답니다. 도시락도 4개나 싸야 한다고 했습니다.

친구는 수감 중에 입버릇처럼 하늘이 온통 회색빛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네가 회색 눈을 가졌으니 그렇다”고 말하는 제게 그 친구는 “그러면 너는 파란색 눈을 가졌냐”고 물었습니다. 파란색은 희망이라면서요. 저는 “회색과 파란색 눈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답했지요. 다만 눈이 회색 눈이 됐을 땐 하늘을 안 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습니다. 회색 눈으로 봐야 회색빛 하늘만 보일 테니까요.

친구는 교도소에 있을 때 자주 독방에서 생활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만도 열여섯 차례가 넘지요. 두 달쯤 독방 안에 있으면 친구는 정말 부지런히, 부지런히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한때는 독방에서 나올 때까지 제 편지를 한두 통 받으려니 생각했었는데, 벌써 30통이나 받았다며 좋아하더군요. 무슨 ‘엄마의 기원’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파란색 눈만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그 친구가 이제 어엿한 정비사가 돼 있습니다. 정말 당당하고 씩씩하게 사회의 보통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꿈을 이룬 것입니다. 또 함께 지내는 소년원 출신 아이들도 곧 검정고시를 본답니다. 친구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아이들을 꼭 대학까지 보내 공부시킬 거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지요. 그 친구가 ‘편쓰사’ 분들에게 전해달랍니다. 편쓰사 가족들이 보내준 사랑, 평생을 바쳐서 보답해드리겠다고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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