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갇혀있던 새처럼 응달에서 그저 일만 열심히 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패션쇼를 준비하면서 느낀 점이 많습니다. 앞으로 기술도 더 업그레이드하고, 생각하고, 연구하여 진정한 명품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정숙 (봉제경력:35년)



"70년대, 80년대, 현재 2006년..내가 만든 옷들이 서민들의 생활과 역사 속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69년생이 봉제업 기술자의 마지막 세대랍니다. 오늘 패션쇼는 69년생이 마지막 세대가 아닌 시작을 의미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최 정 (봉제경력: 20년)




'창신동 아줌마 미싱에 날개 달다'

-뜨거운 열기 넘친 패션쇼 현장.




값비싼 명품옷도 없다. 8등신의 예쁘고 늘씬한 모델도 없다.

대신 그 어떤 명품에 비할 수 없이 정성을 다해 만든 옷과 어설프지만 푸근하고 정감가는 모델들이 있다.


1일 저녁, 서울 동대문운동장에 위치한 서울패션아트홀에서 창신동 미싱 아줌마들의 '아주 특별한 패션쇼'가 열렸다.

가난했던 6,70년대 시절. 생활고에 쫓겨 학업도 포기하고 10대의 나이에 일명 '미싱시다'로 봉제기술을 배우기 시작한 앳된 여공들은 어느덧 중년의 아줌마가 되었다.


우리나라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은 의류업 발전의 주역이자 그 세월과 함께 해온 산 증인인 창신동 미싱 아줌마들.

최고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지만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저임금에 시달리고, 소위 '공순이'라 불리며 사회적으로 노고를 인정받지 못했던 이들이 이날만큼은 어둡고 침침한 작업실을 벗어나 각자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입고 화려한 무대에 올랐다.

그리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갈고 닦은 기술을 아름다운 옷들을 선보임으로써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번에 선보인 옷들은 모두 천연염료와 친환경 소재만을 사용하여 숙련된 기술뿐 아니라 질적인 면에서도 우수성을 자랑했다.


이 날 행사에는 이상수 노동부장관, 장하진 여성가족부장관, 원희룡 한나라당의원, 강금실 여성인권대사, 배우 권해효씨 등 각계각층의 유명인사들도 게스트로 무대에 올라 더욱 자리를 빛냈다.




'좁고 어두운 이 곳에서 오늘도 미싱은 돌아간다'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는 협소한 작업 공간. 열악한 환경에서도 강인하게 생활했던 창신동 미싱아줌마들의 애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난생처음 패션쇼, 긴장 반 설렘 반'

-초조하게 대기실에서 무대에 오르기를 기다리는 이 날의 디자이너 겸 모델들.



'창신동 봉제인들의 애환담긴 패션쇼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행사에 앞서 故전태일 열사의 여동생 전순옥 참여성노동복지터 대표와 어머니인 이소선 여사가 관객들에게 인삿말을 전하고 있다. 전순옥 대표는 "봉제노동자들에게서 동대문 일대를 세계 패션의 메카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았다"며 "우리의 기술로 우리의 브랜드가 보다 좋은 노동 여건에서 고부가가치 산업을 생산할 수 있도록 활로를 열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봉제노동자로서의 자긍심을 가집시다. 화이팅!"

- 행사에 앞서 이상수 노동부장관과 장하진 여성가족부장관이 봉제노동자들이 자신감을 갖고 사회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저도 이 시대의 아줌마랍니다'

-시종일관 화기애애하고 발랄하게 진행을 이끌어간 정용실 KBS 아나운서.










 '당당하고 자유로운 그녀들의 워킹'

- 드디어 본격적인 패션쇼 시작~! 각자 본인이 만든 옷을 입고 자신있게 런웨이를 활보하는 모델들.




 '지금 잘 봐두어야 하는데...'

-2차 런웨이에 모델로 오를 강금실 여성인권대사와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이 1차 런웨이에 선 모델들의 모습을 관심있게 지켜보고 있다.










'조금은 쑥스럽지만 밝게 웃으며'

- 2차 런웨이에서는 옷을 디자인한 봉제사와 유명인사가 짝을 이루어 신나고 발랄한 워킹을 선보였다.








 '두손 꼭 잡은 커플 워킹 어때요'

- 모델들의 마주잡은 두 손과 환한 표정이 아름답다.





'이 정도면 프로 뺨치죠?'

- 세련된 무대 매너로 집중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강금실 여성인권대사.

이어진 인터뷰에서 "패션쇼에 처음 서봤는데 다시 서긴 힘들겠다"며 여유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제 포즈 괜찮아요?'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이 자켓을 벗어 멋진 포즈를 연출하고 있다.




'화이트와 레드의 조화'

-하얀색 상의에 붉은 장미꽃으로 포인트를 준 배우 권해효씨가 밝게 웃으며 디자이너와 함께 등장하고 있다.






'오늘은 우리가 주인공'

- 아바의 '댄싱퀸'이 장내에 크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패션쇼에 참여한 창신동 봉제노동자 30명이 단체워킹으로 피날레를 장식하며 무대의 열기를 최고조로 올렸다.




'이보다 감격스러울 수 있을까'

- 디자이너 기능교육을 담당한 강사와 전순옥 참여성노동복지터 대표가 행사에 참여한 모델들의 박수를 받으며 감격의 눈물을 터뜨리고 있다.



 '성황리에 마친 패션쇼'

- 그녀들의 땀과 노력의 결실에 아낌없는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

창신동 미싱아줌마들의 패션쇼는 그녀들에게는 봉제노동자로서의 자부심을, 관객에게는 무대와 하나되는 감동과 잔치의 장을 선사했다.



-공동취재-
글: 신효정
사진: 몽구

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Posted by 신효정
재소자에게 보낸 수천 통 편지…“결국 나를 변하게 해”
8년째 감옥으로 편지 쓰는 사람 강지원 인터뷰, “편견 버리고 그들을 바라보세요”
미디어다음 / 신효정 프리랜서 기자
“재소자들도 알고 보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편견을 버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봤으면 합니다.”

지난주 미디어다음과 만난 ‘편지 쓰는 사람들’(편쓰사, www.letterpeoples.com) 대표 강지원(37, 여, 사진) 씨는 재소자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편견이 섭섭한 듯 이같이 말했다.

언뜻 연약해 보이는 몸에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강 씨지만 사람들이 재소자들에게 근거 없는 오해를 품고 있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이처럼 강 씨는 재소자들을 ‘편애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도 그럴 만했다. 강 씨가 재소자들을 벗 삼아 보낸 시간이 어느덧 8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강 씨와 재소자들을 이어준 다리는 한 장의 편지. 강 씨가 교도소 담장 너머로 띄워 보낸 편지의 수는 강 씨 자신조차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아마 수천 통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편지 때문에 재소자와 함께 웃고 울어본 때도 수십 차례다. 이같이 재소자들과 남다른 인연을 맺으며 살아왔지만 사실 그 시작이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았다고 강 씨는 말한다.

재소자와 이어준 다리, 한 장의 편지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삶으로…
올해 초 한 재소자가 ‘편쓰사’ 회원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편지지 30장을 이어 붙였다. 당시 재소자는 하루에 세 통밖에 편지를 쓸 수 없는 교도소 내부 규칙이 사라지자 기쁜 마음에 긴 편지를 썼다고 한다. [사진=편쓰사]
“1998년부터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졌어요. 그러다보니 자주 누워있게 됐고,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죠. 그러다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결심을 했어요.”

지금과는 다른 삶. 강 씨에게 그것은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타인을 함께 보듬는 삶을 의미했다.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삶으로, 강 씨는 번쩍 자신의 삶을 ‘들어’ 옮겼다.

이런 강 씨가 외로운 사람들에게 편지 쓰는 일을 자신의 일로 택한 것은 그야말로 강 씨다운 결정이었다. 그는 이 일이 여러 봉사활동 중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편지 쓰기라면 자신의 적성과 꼭 맞는 일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과감하게 강 씨는 자신의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한 잡지에 ‘편지를 보내드립니다’라는 ‘이상한’ 광고를 냈다.

“물질적으로 하는 봉사보다도 마음이 외롭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잡지에 광고를 냈는데, 의외로 재소자 분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죠.”

물론 강 씨에게도 처음 재소자에게 편지를 보낼 때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이 사람에게 어떻게 들릴까. 과연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이 사람들도 공감할까.”

하지만 다 기우였다. 편지를 주고받으면 주고받을수록 강 씨는 재소자들도 모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며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이런 평범한 진실을 깨달아가는 동안 강 씨에게 배달돼 오는 편지는 점점 늘어만 갔다. 어느덧 재소자 100여 명이 강 씨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재소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기우였을 뿐
함께 편지 쓸 사람들 모았지만 재소자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
‘편지 쓰는 사람들’ 홈페이지 화면. [www.letterpeoples.com]
“아무래도 혼자서는 100여 명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낼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함께 재소자에게 편지를 쓸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이게 훗날 편쓰사가 됐죠.”

편쓰사의 모든 편지는 개인 주소가 공개되지 않고 사서함만을 통해 전달된다. 편지를 보내는 횟수는 각자 사정에 따라 조절된다. 대개 회원 한 명이 재소자 2명 이상과 연결돼 한 달에 2회 정도 편지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강 씨는 “이 정도 횟수로 편지를 써서는 재소자들의 편지에 원활하게 답장을 하며 모임을 운영해 나가기 힘들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또 회원 수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한다.

편쓰사의 회원 수는 99년 당시 700여 명이었으나 요즘은 20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강 씨는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자필로 편지를 쓰는 것을 귀찮아하는 탓에 회원 수가 줄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강 씨는 그러나 재소자들의 편지는 나날이 늘어나고만 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재소자들한테서 편지가 많이 올 때는 한 달에 수천 통까지 온다고 한다.

강 씨는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만, 함께 변해가지 못하는 교도소 담장 너머의 재소자들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또 일일이 답장을 쓸 수도 없는 형편에 재소자들의 외로움만 더 짙게 느껴져 항상 마음이 무겁다.

세상은 변하지만, 함께 변해가지 못하는 재소자들
누군가 관심 가져준다는 안도감이 재소자 변하게 하는 원동력
“간절히 편지를 기다리는 재소자 분들께는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편쓰사 회원들이 일상생활도 포기해가며 편지만 쓰는데도 답장을 못 받는 재소자 분들이 대다수니 정말 안타까워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7살과 5살짜리 어린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강 씨에게 육아와 일상생활, 편지 쓰는 일을 병행하는 것은 때때로 버겁게 느껴진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지칠 때는 이 일을 시작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후회를 한 번도 안 해봤다면 거짓말이겠죠. 하루 종일 편지 쓰는 일에만 매달려야 할 때도 많았으니까요. 정말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강 씨가 결코 이 일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간절히 편지를 기다리는 재소자들이 편지를 받았을 때 느낄 기쁨과 희망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딘가에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있다는 안도감. 이런 작은 안도감이 재소자들로 하여금 꾸준히 자신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게 강 씨의 신념이다.

“입버릇처럼 사는 게 고통스럽다고 하던 한 재소자가 어느 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편지를 보내왔어요. 앞으로 더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도 하면서요. 순간 더 열심히 편지를 써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죠.”

강 씨는 요즘 앞으로 활동의 범위를 넓혀 재소자들이 출소 뒤에도 재범을 저지르지 않고 사회에 잘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적인 재활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재소자들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결국 재소자들을 하나둘 변화시켰듯이,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삶으로 번쩍 자신을 ‘들어’ 옮긴 뒤 강 씨 자신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 한 재소자가 ‘편쓰사’ 회원에게 보낸 편지. 이 재소자는 폭력죄로 10년 넘게 수감 생활을 한 뒤 사회로 복귀해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10년 넘는 수감생활을 마치고 사회에서 힘겨운 적응기간을 거치고 있는 한 친구가 오랜만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작은 아파트에서 연고도 없는 소년원 출신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침마다 자신은 정비기술 학원에 가고, 아이들은 검정고시 학원에 보내느라 정신이 없답니다. 도시락도 4개나 싸야 한다고 했습니다.

친구는 수감 중에 입버릇처럼 하늘이 온통 회색빛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네가 회색 눈을 가졌으니 그렇다”고 말하는 제게 그 친구는 “그러면 너는 파란색 눈을 가졌냐”고 물었습니다. 파란색은 희망이라면서요. 저는 “회색과 파란색 눈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답했지요. 다만 눈이 회색 눈이 됐을 땐 하늘을 안 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습니다. 회색 눈으로 봐야 회색빛 하늘만 보일 테니까요.

친구는 교도소에 있을 때 자주 독방에서 생활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만도 열여섯 차례가 넘지요. 두 달쯤 독방 안에 있으면 친구는 정말 부지런히, 부지런히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한때는 독방에서 나올 때까지 제 편지를 한두 통 받으려니 생각했었는데, 벌써 30통이나 받았다며 좋아하더군요. 무슨 ‘엄마의 기원’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파란색 눈만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그 친구가 이제 어엿한 정비사가 돼 있습니다. 정말 당당하고 씩씩하게 사회의 보통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꿈을 이룬 것입니다. 또 함께 지내는 소년원 출신 아이들도 곧 검정고시를 본답니다. 친구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아이들을 꼭 대학까지 보내 공부시킬 거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지요. 그 친구가 ‘편쓰사’ 분들에게 전해달랍니다. 편쓰사 가족들이 보내준 사랑, 평생을 바쳐서 보답해드리겠다고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편지 쓰는 사람들 감옥으로 12년째 편지쓰는 안이영씨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어요” “청년들이 겪는 가난은 ‘상대적 가난’”
[카페] 편지쓰는사람들
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Posted by 신효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