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다음 TV팟에 '교생 실습을 마치며 아이들에게'라는 제목의 UCC 동영상이 올라왔다.


지난 4월, 한 달 간 중학교 아이들을 상대로 교생 실습을 했던 한 대학생이 이별을 앞두고 아이들에 대한 애뜻한 마음을 랩으로 담은 영상이었다. 직접 작사한 가사에 리듬을 붙여 만든 이 동영상은 현재 6만 5천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정말 멋지다', '이 열정을 끝까지 간직하길 바란다'는 네티즌들의 뜨거운 반응과 격려를 얻고 있다.


(화제의 TV팟 동영상 보러가기->http://tvpot.daum.net/theme/ThemeView.do?themeid=130 )




<화제의 동영상 주인공 김현민 씨>


짧지만 아이들을 향한 사랑을 듬뿍 느낄 수 있는 동영상 속 인물을 직접 만나기 위해 25일, 그가 다니는 상명대학교를 찾았다. 화제의 주인공은 현재 국어교육과 4학년에 재학 중인 김현민(25) 씨.


"이런 걸로 인터뷰까지 하게 되다니...쑥스럽고, 긴장되네요"


멋적게 웃으며 수줍어하는 그의 첫 인상은 그저 평범한 대학생의 모습. 하지만 교생 실습 시절의 학생들 이야기가 나오자 어느 새 의젓하고도 당당한 '선생님'으로 돌변하는 그다.



장기 살린 감동의 랩 UCC



"홍은중학교에서 1학년 국어과목 교생을 맡았었어요. 한 달 동안 느낀 점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고마웠고 정도 많이 들어서 헤어지기 정말 아쉬웠죠.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랩으로 UCC를 만들게 된거예요. 저에게도, 아이들에게도 평생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고등학교 때부터 힙합과 흑인음악에 관심이 많았다는 그는 친구들끼리 모여 가사도 쓰고 클럽을 빌려 공연도 하곤 했다. 동영상 속 랩 가사를 30분도 안 걸려 금세 만들어 낼 정도의 실력자이기도 하다.


"랩은 노래보다 한 곡 안에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이 많아서 좋은 것 같아요. 아직도 아이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말이 많은데 다 담아내지 못한 것 같아서 좀 아쉬워요"


동영상을 본 아이들은 선생님의 깜짝 선물에 감동을 받았다며 '선생님 고마워요' '선생님 사랑해요' 라는 메시지들을 보내왔다.


"사실 저는 학창시절에 교생 선생님에 대한 특별한 기억이 없어요. 하지만 제가 가르친 아이들에게는 잊지 못할 즐거운 추억을 선사해준 것 같아서 정말 뿌듯해요"




아이들이 선사한 소중한 기억


물론, 처음부터 친해질 순 없었다. 조금은 어색했던 첫 만남. 중학교에 갓 입학한 아이들은 처음 맞이하는 교생 선생님을 보고 신기해하며 수근거렸지만 정작 먼저 다가오지는 않았다.


"제가 적극적으로 다가가기로 했죠. 딱딱한 이야기보다는 학교 생활 얘기, 좋아하는 연예인 얘기, 재미있게 본 영화 얘기 같은 걸 하면서요. 그렇게 먼저 다가가니까 아이들도 금세 마음을 열더라고요"


교생 실습 동안 그의 열정은 남달랐다. 정식 출근 시간은 8시 20분이었지만 그는 늘 6시 반까지 학교에 도착해 자신이 맡은 학급 뿐 아니라 다른 학급들도 돌아보고 일찍 등교한 아이들의 말벗도 되어주었다.


"밝게 웃어주고, 인사하고, 반겨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은 참 좋아하는 것 같아요. 요즘 애들 이렇다 저렇다 얘기도 많지만 제가 봤을 때 아이들은 굉장히 순수하고 착해요. 단지 표현하는 법이 서툴러서 그렇지 본성은 때묻지 않은 그냥 아이들이에요"


그는 교생을 하면서 교사가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은 '진심'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아이들이 저에게 이런 얘기를 했어요. '교생 선생님은 어차피 한 달만 있다가 가는데 친해지면 뭐하나, 애정은 줘서 뭐하나' 이렇게 생각했대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제가 진심으로 자기들을 아끼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고 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제 진심이 전달된 것 같아서 울컥했죠"


교생 실습 마지막 날, 그와 아이들은 서로의 '진심'을 전달했다.


"아이들이 저를 위한 깜짝 이벤트를 마련했더라고요. 교실을 풍선으로 예쁘게 꾸미고, 초코파이로 케잌도 만들어주고, 편지도 주고요. 정이 넘치는 아이들이죠. 정말 눈물나게 고마웠어요. 저도 답례로 짱구가 그려진 귀여운 캐릭터 양말을 한 켤레씩 선물했는데 아주 좋아하더라고요"



<아이들이 김현민 씨에게 준 편지와 그림들>

그가 아이들에게 준 선물은 양말 뿐이 아니었다.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랩과 춤을 준비했는데, 사실 춤은 추기 좀 힘들었어요. 제가 선천적으로 심장병이 있거든요. 다섯 살 때 대수술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건강이 안좋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춤을 추었다. 아이들에게 꼭 전해주고 싶은 메시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어릴 적부터 심장병이 있었고 몸이 약했지만 난 내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나는 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나갈 수 있다고 믿었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다짐해서 랩 공연도 하고, 농활도 다녀오고, 여러가지 활동을 하면서 내 인생을 만들어 나갔어. 너희들은 나보다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니 많이 부딪쳐보면서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을 찾길 바래'





<아이들과 함께한 소중한 순간들>



사랑으로 가르치는 진정한 선생님 되고파


왠지 모를 묘한 감정에 휩싸여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도 있었다.


"저희 반 남자아이 중 하나가 저에게 자기의 꿈도 선생님이라고 하더라고요. 저도 처음 선생님의 꿈을 품은 게 중학교 1학년 때였거든요. 기분이 묘하면서 뭉클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 아이에게서 선생님을 꿈꾸던 어린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그 꿈, 꼭 이루라고 했죠. 저의 격려가 그 아이에게 힘이 되고 또, 훗날 그 아이가 뭉클한 마음으로 추억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교생 실습을 통해 그가 얻은 것은 아이들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선생님이 되고싶다는 그의 꿈에 대한 '확신'이었다.


"전 아이들이 정말 좋아요.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 만큼 요즘 아이들은 나쁘지 않아요. 단지 속마음을 능숙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 뿐이죠. 그런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돼서 많은 사랑을 주고 싶었지만 '내가 교사가 될 수 있을까', '과연 교사가 내길일까'라는 의구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교생 실습을 통해서 그런 고민들이 확 날아갔어요.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저에겐 가장 소중하고 행복했거든요. '내가 갈 길은 이 길이다'라는 확신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제 꿈에 대한 확신을 준 아이들에게 더 고마워요"


그는 단순히 수업만 잘 가르치는 선생님이 아닌, 아이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선생님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선생님이라는 역할은 수업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아이들 생활 지도가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 같아요.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것이 아닌, 아이들의 인생에 밝은 빛이 돼 줄 수 있는 진정한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제가 예전에 쓴 랩의 가사 중에 '교실이란 클럽안에/ 교단이란 무대위에/ 학생이란 관객앞에/수업이란 공연을해' 라는 구절이 있어요. 그게 제 인생의 목표랍니다. 앞으로 열심히 노력해서 꼭 학생이라는 관객 앞에서 아주 멋진 공연을 하고 싶어요.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꼭 그렇게 할 거예요"




아이들에게 전하는 랩을 부탁하자 5분 여 만에 두 개의 랩을 즉석에서 만들어 내는 김현민 씨입니다.^^



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Posted by 신효정
<작은 승리자들>

"이만큼 자라준 것만으로도 정말 기특하고 고마워요. 이런 게 기적이라는 것 같아요"


지난 2005년 12월, KBS 인간극장을 통해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사연이 방영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과 감동의 눈물을 전해주었던 쌍둥이 남매 이서원(누나), 이인호(동생)가 오는 1월 6일 감격적인 첫 돌을 맞는다.


                                           

     


[관련기사] = 700g 쌍둥이 남매…피눈물로 쓴 육아일기 (2005.12.19)


[관련링크] = KBS 인간극장 '선물'


서원이와 인호는 정확히 2005년 10월 2일에 태어났다.임신 후 25주 5일만의 출산. 너무도 이른 만남이었다. 그렇게 서원이와 인호는 한창 엄마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야할 시기에 각각 710g, 770g의 미숙아로 세상에 나왔다.


태어나자마자 조그마한 인큐베이터 안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여야 했던 쌍둥이들.18개의 합병증을 갖고 태어난 누나 서원이는 온 몸에 호스를 꽂고 지내며 710g밖에 되지 않는 몸으로 뇌수술만 열 차례를 받았다. 이후에도 신생아 괴사장염으로 인한 배수술 두 차례, 미숙아 망막증으로 인한 눈수술도 받아야 했다. 호흡기와 목에 큰 문제가 있었던 동생 인호 역시 770g의 작은 체구로 네 차례의 목 수술을 받고 그 후 배수술 세 차례, 심장수술 한 차례를 더 받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사를 오갔던 서원이와 인호였다.당시 병원에서는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며 포기하라는 말까지 했지만 어른 손바닥만한 작은 몸으로도 남매는 70여 일간을 인큐베이터 속에서 씩싹하게 잘 버텨주었고, 쌍둥이 남매의 엄마 허진주(26)씨와 아빠 이선우(36)씨의 아이들을 향한 지극한 사랑과 정성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과 눈물 속으로 몰아넣었다.


 


그 후 1년여의 시간이 흐른 지난 4일, 곧 첫돌을 맞이하는 쌍둥이의 집을 찾았다.얼핏 보기에도 1년 전에 비해 많이 자란 모습이었다.현재 서원이의 체중은 8kg, 인호는 8.8kg이다.또래의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여전히 적은 체중이지만 엄마인 진주 씨는 "이 정도는 많이 좋아진것"이라며 미소를 짓는다.


"처음에 이유식 시작할 땐 아이들이 너무 안 먹어서 걱정을 많이 했는데 지금은 식탐이 강해졌어요. 특히 인호는 먹을 걸 보면 가만히 있지를 못해요"


아니나 다를까 인호가 갑자기 기자가 마시던 오렌지 주스를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진주 씨가 재빨리 주스통에 빨대를 꽂아 쥐어주자 기다렸다는 듯이 꿀꺽꿀꺽 잘 먹는 인호다. 제법 잘 움직이며 기어다니는 인호와 달리 서원이는 누운 채로 많이 움직이지 못했다.


  


"서원이는 아직 몸을 못 가눠요. 뇌수술을 열 번이나 해서 그런지 기는 것도, 앉는 것도, 뒤집기도 못하고..전혀 발달이 되지 않은 상태에요". 뇌출혈과 뇌손상이 심했던 서원이는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다. 미숙아 망막증으로 인하여 눈의 초점을 잘 맞추지 못하고 시력도 좋지 않은 상태.


인호는 몸은 가누지만 목소리를 전혀 낼 수 없다. 인호의 목에는 기도와 연결된 튜브가 붙어있다.태어날 때부터 목에 문제가 있었던 인호는 코와 입을 통해서 숨을 쉬지 못하고 기도와 연결된 튜브를 통해 성대로 숨을 쉰다. 때문에 인호는 6개월에 한번씩 기도확장수술을 받아야 한다.


  

현재로써 서원이와 인호에게 할 수 있는 최선은 일주일에 네 번씩 꾸준히 받고 있는 재활치료. 그러나 이마저도 병원에서 호전을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게다가 면역력이 약해 잦은 폐렴과 감기로 응급실을 들락거리고 며칠씩 입원하는 일이 여전히 부지기수다.


"서원이, 인호 둘 다 발달이 많이 느려요. 그래도 1년 전을 생각하면 정말 기특하고 고마워요. 평생동안 인공호흡기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거라고 했는데 이만큼이라도 잘 자라줘서 돌잔치도 할 수 있다는 것이......"


말끝을 흐리는 진주 씨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서원이와 인호의 아주 특별한 돌잔치>


쌍둥이는 2005년 10월 2일에 태어났지만 정상적으로 분만했다면 2006년 1월이 생일이 되었을 터.건강한 아이들의 모습을 그리며 1월에 돌을 준비하는 이들 부부에게 쌍둥이의 돌잔치는 남다른 감회를 갖게 한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 돌잔치까지 할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이렇게 많이 건강해져서 큰 탈없이 돌잔치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기쁩니다. 지금까지 잘 견뎌준 서원이와 인호가 자랑스러워요"


아빠인 선우 씨는 "이사, 사업 등 중요한 일들을 일단 돌잔치 이후로 모두 미뤄놓았다"고 말했다.


"저희 부부에게 아이들의 돌잔치는 단순한 돌잔치 그 이상의 정말 뜻깊은 행사입니다. 아이들이 태어나고 1년 여 동안 돌잔치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요. 아이들이 건강해지면 돌잔치를 꼭 해주고싶은 마음이 간절했거든요. 이제 꿈을 이루게 됐어요. 일단 '서원이와 인호의 돌잔치'라는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생긴 후에 다른 모든 일들을 새롭게 시작하려고 해요"


설레는 목소리로 아이들 돌잔치 이야기를 하는 선우 씨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한다.


<너희들은 내 운명>


"솔직히, 이렇게 커다란 시련을 준 하늘을 원망해보기도 했었어요. 또, 아이들이 조금 더 크면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때때로 생각하면 덜컥 겁이 나기도 하고요" 진주 씨가 그 동안 힘들었던 솔직한 심정을 토로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잡아주어도 전혀 몸을 가누지 못하던 서원이가 외할머니에게 기대어 꽤 오래 서있는 모습을 보고 금세 표정이 밝아지는 진주 씨는 천상 '엄마'였다.


                         

     '잡아줘도 힘이 없어 못서있엇는데 저렇게 서 있는건 지금이 처음이다'라며 기뻐했다.


"서원이가 저렇게 서있는 건 오늘이 처음이에요. 바로 이런 게 행복인 것 같아요. 발달이 느리지만 그만큼 감격이 두 배가 되거든요. 서원이가 처음 스스로 호흡하게 됐을때, 인호가 네발기기를 처음 했을때...그때의 감격과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비록 다른 아이들보다 많이 느리지만 하나하나씩 해내는 걸 보면 정말 신기하고 행복해요"


진주 씨는 아이들을 하늘이 준 소중한 선물이자, 누군가가 자신에게 정해준 '운명'이라고 여긴다.


"지금보다 의학이 발달하면 반드시 더 좋아질 거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그때까지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키울 거예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부부. 이들의 새해 소망은 오직 하나다.뇌성마비인 서원이가 조금이나마 몸을 가누게 되는 것,코로 호흡할 수 없는 인호가 목에 연결된 튜브를 떼고 편하게 숨을 쉴 수 있게 되는 것. 그렇게 아이들의 건강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것이다. 여느 사람들에게는 매우 사소한 것이 이들 가족에게는 올해의 간절한 소망이 되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처럼 부부의 사랑과 정성으로 그 소원이 꼭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다.



<희망, 버리지 마세요>


-이선우, 허진주 부부의 메시지-


서원이와 인호를 낳고 병원에 다니면서 그제서야 이 땅에 미숙아로 태어나 아픈 아이들이 정말 많다는 걸 알았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보는 것 같아서 볼 때마다 안타깝고 가슴이 아픕니다.1년 여 전 방송이 나간 이후, 많은 분들이 걱정해주시고 응원과 격려를 보내주셔서 정말 힘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먼 지방에서 직접 찾아오신 분도 계셨고 자신의 일처럼 성심성의껏 신경써 주시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그 마음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실, 방송 이후에 격려도 많이 받았지만 악플이나 오해들로 인한 상처도 그만큼 받았습니다.마음고생도 많이 했죠. 정말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심정을 모르거든요.그래서 서원이, 인호 돌잔치로 인해 미디어다음에서 인터뷰 제의가 들어왔을 때 처음엔 거절했습니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나의 치부일 수도 있고, 좋은 일도 아닌데 굳이 더 알려야 할 이유를 못 느꼈기에..또, 사람마다 관점이 다르듯이 삐딱한 시선으로 보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테니까요.


하지만 결국 인터뷰에 응했습니다.그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희망'입니다.방송 이후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신도 미숙아의 엄마라며 서원이와 인호의 상태를 메일이나 쪽지로 꾸준히 물어오는 엄마들이 많이 계십니다.


'병원에서도 포기했고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다''아이가 생사를 오가는데 살아만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는모두 마음 아픈 절절한 사연들이었습니다.그때 알았습니다.그 분들에게는 저희 아이들이 바로 '희망'이었다는 걸요.


단순히 저희 아이들의 병을 알리자는 것이 아닙니다.병원에서 생존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던 우리 아이들도 희망을 갖고 이만큼 잘 키웠으니까 비슷한 일로 힘들어하시는 다른 많은 분들도 힘을 내시길 바라는 마음, 그거 하나 뿐입니다.미숙아를 키우는 이 땅의 모든 부모님들 힘내세요.




 



                                                                                     

인터뷰/글: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사진: 몽구
영상: 몽치

                                                               

Posted by 신효정

'엄마가 섬그늘에..굴 따러 가면..'


어릴 적부터 난 이 노래를 좋아했다. 이 노래를 들으면 어느 새 눈 앞에 깊고 푸른 바다가 그려진다.

서울에서 태어나 내내 서울에서 자란 나지만 푸른 바다를 떠올리면 왠지 모를 마음의 평온함과 아득한 향수마저 느껴진다.


아마도 잔잔한 바다...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망망대해가 본능적으로 어머니의 품처럼 푸근하게 느껴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바로 그 아름답고 푸른 바다를 닮은 8명의 어린이들이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을 찾았다.


지난 18일부터 21일까지 섬문화연구소, 서울여자대학교, 한국시인협회가 주최한 '제1회 낙도분교 어린이 서울 초청행사'가 3박 4일의 일정으로 치러졌다.


초청을 받은 낙도 어린이 8명은 지난 3일 동안 서울의 중심문화라고 할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체험해 보았다. 신문사와 방송사를 견학하고 서울의 명물인 청계천과 시청광장도 구경했다. 또, 대통령이 살고있다는 청와대도 가보았다.

서울여대에 방문해서 캠퍼스도 거닐어보고 예쁜 언니, 누나들과함께 도자기도 직접 구워보는 등 즐거운 시간을 보낸 8명의 아이들.

무엇이든 호기심에 가득찬 아이들인만큼 눈코뜰새 없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 새 21일, 마지막 날이다.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방문할 곳은 뭐니뭐니해도 아이들이 가장 좋아할 것임에 틀림 없는 '놀이공원'으로 결정됐다.


비록 3일 간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아이들이 가기 전에 만나볼 마지막 기회인 오늘(21일)은 놓치지 않고 서둘러 아침부터 동행길에 올랐다.


버스에 동승하자마자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눈동자가 하나둘씩 들어온다.

처음보는 나에게도 낯가리지 않고 '안녕하세요' 똘망똘망하게 인사를 하는 아이들.

외딴 섬에서 많게는 전교생 8명, 적게는 덜렁 혼자서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만큼 아이들의 첫인상은 사교성과 명랑함이 넘쳐 흘렀다.



제일 처음 눈에 들어온 녀석. 조기흠(신지동분교 1년 /모황도 거주)

이때까진 참 얌전해 보였던 기흠이. 알고보면 귀여운 장난꾸러기다.

얼마 전 완도 미용실에서 엄마가 귀를 뚫어주셨단다.

사진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왼쪽 귀에 멋진 귀걸이까지 달고온 은근 센스쟁이다.

 


새침한 듯, 밝은 듯, 그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갖고 있는 발랄함을 지닌 김수현(횡간분교 6년/횡간도 거주), 장현지(횡간분교 3년/횡간도 거주) 이동 내내 노래에 맞춰 손바닥을 마주치는 놀이에 푹 빠져있는 모습에 저절로 나의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손바닥놀이삼매경 중인 수현이와 현지에게 인사를 건네자 들뜬 목소리로 까르르 웃는다.


"현지야, 서울오니까 어땠어? 서울이 좋아 아니면 섬이 더 좋아?"

"서울이 더 재밌어요. 근데요 나쁜 점도 있어요. 공기도 안좋고요~깡패도 많고요~납치범도 많아서 무서워요. 그리고 왕따도 많잖아요"

"현지네 학교는 왕따 없어?"^^

"우린 그런 거 없어요~다들 친해요~"


그런데 얘기를 나누던 중 갑자기 현지가 기자의 치아교정기를 보고 대뜸 묻는다.


"언니 근데 이빨에 그게 뭐예요?"

"응...? 이거? 저기...치아교정기"

"그게 뭔데요? 언니 이빨 잘 안닦았서 그러죠?"

"응..? 으응....그러니까 너희들은 양치질 잘해야해" -.-;;


순간 머쓱해졌지만 치아교정기를 보고 신기해 하는 아이들이 귀엽게 느껴졌다.



미소공주 주혜림(군외 분교 1년/백일도 거주)

무엇을 물어봐도 수줍은 듯 '몰라요..."라는 말로 일관하며 배시시 웃는 혜림이.

섬과 서울 중 어디가 더 좋냐는 물음에 역시나 배시시 웃으면서 수줍게 '섬' 이라고 대답한다. 오빠와 함께 바닷가에서 파도를 맞으며 수영하는 게 재미있단다.

"서울은 재미없어?" 라고 묻자..또다시..배시시 웃으며 말한다 "몰라요...."

 


이때 어디선가 조그마한 노랫가락이 들린다.


"짠짠짠~하게 하지 말아요~잘 가요 안녕 내 사랑~"



노래를 좋아하는 김수민(횡간분교 1년/횡간도 거주)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예쁜 목소리로 내내 노래를 부르던 수민이.

'어른들은 몰라요' 같은 동요부터 최신 가요, 트로트까지 모두 소화~!!

가장 좋아하는 가수는 장윤정이라고.

평소엔 굉장히 수줍음이 많은 수민이지만 노래를 할때만큼은 그 어느때 보다도 자신있고 즐거워보인다.

 

 

"나도 노래 잘하는데~내가 노래 더 잘할 수 있어요~!!!"



무조건 다 잘할 수 있다는 자칭 만능맨! 넉살좋은 개구쟁이 최진환(모도 분교 2년/모도 거주) 진환이는 선생님과 둘이서만 공부하는 모도 분교의 유일한 학생이다.

같이 공부하는 친구가 없어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학교가 좋단다.



"진환이도 노래 잘해?"

"네!"

"그럼 한 번 불러 봐"

"음....."


막상 멍석을 깔아주니 쑥스러운 양 고개를 빼던 진환이.

잠시 후 조그마한 목소리로 웅얼웅얼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노래 제목은 '파워레인저'라고.


"와~진환이 노래 잘한다. 그럼 가수가 꿈이야?"

"아뇨, 노래는 잘하는데요~꿈은 우주비행사예요!"

"왜 우주비행사가 되고싶은데?"

"우주비행사는 달에도 가고 우주도 가니까 재밌을 것 같아서요"

"진환이가 사는 섬보다 더?"

난감한듯 잠시 망설이던 진환이가 입을 열었다.

"음..섬도 재밌는데요~그래도 우주가 쬐금~더 재밌을꺼 같아요"


아이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놀이동산에 도착했다.





먼저 잘생긴 주혜성(군외분교 3년/백일도 거주), 귀여운 주혜림 남매의 기념촬영.

혜성이와 혜림이가 다니는 군외분교는 이들 남매가 전교생이라고 한다.





6학년 맏형답게 늠름하고 의젓한 장효민-오른쪽-(횡간분교 6년/ 횡간도 거주)

수민이, 현지, 수현이등 횡간분교 후배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낙도 어린이들 모여라~ 깜찍한 단체사진.

 




왼쪽 눈두덩이가 빨갛게 부은 기흠이. 혹시 눈병이나 다래끼인가 싶어 물어봤더니 범인은 글쎄 '모기'란다.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 그저 지켜보기만해도 천진난만함이 묻어나 나에게까지 아이들의 '천진난만 바이러스'가 옮겨지는 기분이었다.

 


'카메라 똑바로 봐야지~' 의젓한 6학년 맏형 효민이와 눈이 예쁜 혜성이.

 


그러나 제 아무리 의젓한 맏형이라도 가끔 이렇게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서비스를 잊지 않는다.

 


놀이기구를 기다리는 아이들. 진환이와 기흠이의 꼭 잡은 손이 야무지다.

 


씩씩하고 늠름해보이는 효민이. 하지만 의외로 말수도 적고 쑥스러움도 많이 탄다.

 


"재미 하나도 없었어요~해골만 나오고 무섭기만 했어요~"

신밧드의 모험을 타고 너무 무서웠다며 울음을 터뜨리는 수민이.

 



놀이기구를 타기 위해선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 신장 측정~자신있게 도전! 그러나...

 


'이런~아슬아슬하게 딱 걸렸네" 제한 신장 122cm에서 조금 모자란다. 



결국 어린이용 관람차를 타는 저학년 아이들. 안타깝지만 다음에 서울 올 때까지 쑥쑥 자라있기를 바랄께.

 



'너희들 손에서 땀 안나니?'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 절대 손을 놓지않는 단짝 진환이와 기흠이다.

 


'무서워요~' 겁이 많은 수민이 오늘 연신 울음이 터진다. 그래도 노래할때 만큼은 아무 것도 의식하지 않는 것을 보면 가수의 끼를 타고 난 것 같다.

 




아르바이트생이 뿌려주는 비누방울을 보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들. 아이들의 밝은 웃음이 일을 하던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에도 환한 미소를 주었다.

 




'벌써부터 아이들과 헤어질 일이 걱정이에요'

아이들은 3박 4일동안 서울여대 홍보대사인 4명의 '바롬이' 언니, 누나들과 일정을 함께했다. 아이들은 친언니, 친누나처럼 바롬이들을 잘 따랐고 바롬이들 역시 아이들을 친동생처럼 잘 보살펴주었다. 바롬이들은 아이들이 첫날 자신들의 이름을 다 외운 것을 보고 감동을 받기도 했다고. 그리고 아이들 대부분이 편부모 가정이나 조부모 슬하에서 자란 아이들이라 더욱 애정을 주고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요구를 들어주지는 않았다.

서울에 온 만큼 아이들은 먹고싶은 것 갖고싶은 것등을 사달라고 하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서울에 다녀와서 버릇이 없어졌다"라는 말을 안듣도록 제재할 것은 확실히 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어느덧 떠나기 전 마지막 기념 촬영. 예쁜 머리띠를 한 공주님들.

 



개구쟁이 기흠이와 진환이는 공놀이에 여념이 없다.



즐거운 점심시간. 역시 아이들답게 탕수육, 볶음밥보다 짜장면을 제일 좋아한다.

이제 점심을 먹고나면 서울을 떠나 각자의 집으로 가게된다.

 


'서울의 추억을 뒤로하고....'

드디어 돌아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용산역에 도착한 아이들.

효민이의 얼굴에서 아쉬움이 묻어난다.

 




헤어지기 전, 섬문화연구소 박상건 소장과 바롬이 언니들과 기념촬영을 하는 아이들.

이 순간 아이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언니들 잊어버리면 안돼~우리 이름 다 기억하지?'

'언니 이름은 전민진, 또 언니는 박은진, 여현미, 가하영.......'



아쉬운 작별의 시간. 3박4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바롬이들과 정이 흠뻑 들은 아이들은 이별의 섭섭함을 감추지 못한다.


내내 방글방글 웃던 미소공주 혜림이도 이제야 이별이 실감이 나는지 울음을 터뜨린다.



'언니 헤어지기 싫어요~'




'누나 우리 섬에 꼭 놀러와요~내가 광어랑 갈치랑 다 잡아줄 수 있어요'



유난히 누나들을 잘 따르던 효민이는 정작 헤어질 때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애써 담담한 척 하려는 표정이 효민이의 마음을 잘 말해주는 듯 하다.




'아쉬움에 눈물만...'





'다시 만날때까지 안녕'

떠나는 아이들도 보내는 바롬이들도 좀처럼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눈물을 삼킨다.

 

 


반나절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나 역시 아이들의 때묻지 않은 순수한 매력에 빠져들었고

그들 덕분에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직접 만나본 낙도 아이들...


장난꾸러기 기흠이, 엉뚱한 진환이, 새침떼기 현지, 마음 여린 수현이, 얌전한 혜림이, 씩씩한 혜성이, 의젓한 효민이, 수줍음 많은 수민이...제각기 성격은 다르지만 바다를 닮은 순수하고 맑은 마음만큼은 모두 같았다.


아이들은 서울에서 낙도의 넓은 바다만큼이나 또다른 많은 것들을 눈과 가슴에 담고 간다.

이 곳에서 겪은 소중한 체험들을 통해 아름다운 섬에서 한층 더 커다랗고 푸른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부디 그 순수함과 푸른 꿈을 오래도록 간직하기를......


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Posted by 신효정
 

‘노부부의 아름다운 동행’


<전신마비 아내 23년째 돌보는 정성균 할아버지>


얼마 전 전신마비의 아내를 23년 동안 한결같이 돌보고 있다는 한 할아버지에 대한 제보를 받았다.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정성스러운 간병으로 할아버지는 이미 동네에서는 유명인사라고 했다.

짤막하게 전해들은 사연이었지만 왠지 꼭 한 번 찾아뵙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봄기운이 완연했던 지난 4월 5일, 마침내 경기도 양주시에 있는 정성균(69) 할아버지 , 손난심(66) 할머니 댁을 찾았다.

문이 열리자 할아버지께서 반갑게 맞아주신다.

아담하고도 잘 정돈된 집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어주시자 마자 할아버지가 다시 부리나케 방으로 들어가신다.

마침 할머니를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기고 계시는 중이었는지 힘겹게 휠체어에 앉아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점퍼를 입히고 , 두꺼운 덧버선을 몇 겹씩 신겨드렸다.

춥지 않도록 목에도 정성스럽게 스카프를 둘러주시고 몸에 연결된 소변팩도 휠체어 옆으로 정리하고, 마지막으로 할머니의 팔과 어깨, 다리를 연신 주물러주신 후에야 힘겨운 한숨을 후-뱉으신다.


“이제 됐어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차라도 한 잔 대접해드려야지...”

 






할아버지께서 커피를 준비하고 계신 동안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안 추우세요?”

 

다소 더운 듯한 날씨라 반소매 차림으로 실내에 들어선 기자를 보고 할머니께서 희미한 목소리로 처음 꺼내신 말이다.


“오늘 밖의 날씨 엄청 따뜻한걸요^^”


“난 너무 추운데....항상 추워서...집안에서도 이렇게 두껍게 입고 있어야 해....”



곧, 깔끔한 컵에 커피 두 잔을 내어 오신 할아버지는 인터뷰 중에도 할머니에게 내내 신경이 쓰이시는지 좀처럼 할머니께 시선을 떼지 못하며 이야기를 시작하셨다.


“1984년 10월 22일, 내가 날짜까지도 정확하게 기억해요. 아내에게 사고가 났던 날 말이에요”


당시 40대 중년이었던 할머니는 김장을 담글 재료를 구하기 위해 친구 분들과 춘천으로 가던 길에 사고를 당했다.

청평댐을 건너던 중 차가 마주오던 트럭과의 충돌을 피한다는 것이 그만 강물로 빠져버리고 만 것이다.

동승했던 사람들은 모두 사망했고 마침 지나가던 고기잡이배에 할머니만이 유일하게 구조됐다. 

그야말로 ‘구사일생’인 셈이었다.



 

“새벽 2시에야 연락을 받았어요. 병원으로 달려갔더니 글쎄 머리는 빡빡 다 깎여있고...눈은 토끼 눈처럼 빨갛게 충혈 돼서...몸은 물을 먹어 엄청나게 부어있고 말야....”


애써 담담한 말투로 당시를 회상하는 할아버지는 목이 메는 듯 잠시 말씀을 잇지 못하셨다.





그때부터 부부의 인생은 180도로 달라졌다.

할머니는 중환자실에서 8개월, 일반 병동에서 1년 2개월의 길고긴 투병 생활을 해야 했고 할아버지는 하던 사업도 접고 아내의 간병에 매진했다.

그러나 결국 돌아온 것은 절망적인 전신마비 판정이었다.


“그때까지는 전신마비라니..상상도 못했지. 그저 치료 잘 받으면 나아질 줄만 알았어요....얼굴과 목을 제외하고는 그 밑으로는 전혀 움직이지도 못하고 감각도 없다고 하는데....정말 앞이 깜깜하더라고요”


한 동안 끔찍한 고통과 절망의 시간들을 보내야만 했다.

한 번은 자식들에게 모든 것을 맡긴 채 열흘 동안 홀로 사라져버린 적도 있었다.

“그 때는 내가 내가 아니었어요...정말 내 생을 포기하려는 그런 심정이었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갈등을 하고...아마 그 때가 가장 힘든 시기였던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런 할아버지를 붙잡아 준 것은 ‘부부의 연’이라는 단단한 줄이었다.


“아내와 결혼하던 순간을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부부 서약에 이런 구절이 있잖아요.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한결같이 사랑하겠노라고...그 서약을 떠올려보니 나 혼자 잘살아봤자 절대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았어요. 한 번 맺은 부부의 연인데...끝까지 내가 짊어지고 갈 운명이라고 받아들였죠. 그렇게 아내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며 하루하루 지내다보니 어느 새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네요”


    <사고 전 젊은 시절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


   <사고가 난 지 약 10여 년 후에 부부가 함께찍은 사진. 이도 벌써 10년이 넘은 사진이 되었다 >

 


매일 아침 아내를 관장해주는 일부터 시작하여 씻기고, 식사를 준비해서 먹여주고,

근육이완제와 변비약을 시간 맞춰 먹이고,  책을 시키고,

근육 경직 때문에 수시로 온 몸을 주물러주고,

욕창을 방지하기 위해 두 시간마다 몸의 위치를 바꿔줘야만 하는 일은 이제 할아버지에게는 익숙한 일상이 되었다 .

때문에 밤에도 단잠을 자는 것은 포기한 지 오래이다.


    < 커다란 달력에는 할머니를 위한 간병 일지가 꼼꼼하게 적혀있다>

 

 

힘들지 않으시냐는 물음에 오히려 아내에게 고맙다고 말씀하신다.


“내가 당뇨가 있거든...그래서 운동을 좀 해줘야 좋다는데 아내 덕분에 나도 열심히 몸 움직이고 운동해서 건강해진다고 생각해요. 짜증내면 한도 끝도 없는 건데...내 건강을 위해서 움직이게 해준다고 바꿔서 생각하면 아내에게 얼마나 고마운 일이예요?


    <인터뷰 중에도 시종일관 할머니를 챙기시고 경직된 몸을 주물러주는데 여념이 없다>


이런 할아버지이기에 주위에서는 ‘천사’로 불리지만 정작 할아버지 본인은 ‘부담스럽다’고 손사래를 치신다.


“부부간에 한 쪽이 아프면 당연히 간병하는 거지 뭐가 대단하다고...젊어서 고생만 시킨 아내인데 내가 당연히 돌봐야죠. 만일 내가 다쳤다면 아내도 나에게 이렇게 했을 거예요”


이쯤 되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만남과 연애시절이 궁금해졌다.


“어릴 적에 시골 한 동네에서 자랐어요. 당시 난 고등학생이었고 아내는 중학교 3학년이었지. 내 여동생의 선배였는데 집에 자주 놀러오곤 해서 내가 수학도 가르쳐주고 하면서 정이 들었죠.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동생으로만 생각했는데...어느 순간 참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참...그 땐 정말 예뻤지....물론, 지금도 예쁘지만”


당시를 회상하는 할아버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흘렀다.

분위기를 조금 밝게 할 수 있는 기회였다.

가장 기뻤던 순간을 여쭤보자 자녀들이 결혼하던 순간을 꼽으셨다.


“아내의 이 불편한 몸으로도 4남매 중 3명을 모두 출가시켰어요. 그 순간이 제일 기뻤던 것 같아요. 아이들도 고생 많이 했거든요. 큰 딸은 다니던 대학까지 그만두어야 했고요..그게 항상 미안했는데 다행히 다들 좋은 배우자 만나 출가하여 자리 잡았으니 기쁘죠. 이제 하나 남은 막내만 장가가면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요”



   < 불편한 몸으로도 할머니는 4남매 중 3자녀를 모두 출가시켰다 >


자식들 이야기를 하시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행복해보였다.

지금 행복하시냐는 물음에도 역시 주저 없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다.


“주위에 출세한 사람들도 많죠. 그런데 난 이렇게 사는 게 지금 정말 행복해. 명예나 권력이 없어도 우리 부부 함께 있다는 것, 그래서 서로 의지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감사해요. 더 뭘 바라겠어요. 고통도 다 이겨낼 수 있는 것, 그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니까 된 거예요. 사랑 없이 사람이 살 수 있나? 우리 부부 남은 생 실컷 사랑하다가 죽는 날까지 함께 가는 게 저의 작은 소망입니다”


 

   <"두 분 사진 좀 찍을께요"라는 기자의 주문에 할머니의 머리부터 곱게 빗겨주시는 할아버지>

   <조금만 웃어달라는 주문에 할머니께선 힘드신 와중에도 엷은 미소를 지어주신다>


    <두분 산책 나가시기 직전에 한 컷^^>


<매일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산책시키는 일 역시 일과 중 하나>



   <바깥에 나오니 조금 기분이 좋아지신 듯 보이죠?^^>

<산책하러 나오면 동네 단골 분식점에서 김밥과 잔치국수 드시는 걸 좋아하신다는 할머니^^>

  <할아버지, 할머니. 지금처럼 두분 사랑 변함없이 오래도록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Posted by 신효정

사할린동포 독거노인 위한 ‘끝이 없는 봉사’

5년째 사비 털어 김장 담가주고 무료장례 130번 치러준 장례식장 주인
본인은 월세 30만원짜리 ‘사글세 삶’…“삶 자체 봉사인 사람” 평가

미디어다음 / 글, 사진=신효정 프리랜서 기자


매서운 초겨울 바람이 불던 지난 16일.

경기도 안산의 한 공원에 앞치마를 두르고 고무장갑을 낀아주머니 50여 명이 모여들었다.

공원 한 구석에 수북이 쌓여 있는 것들은 배추, 무, 고춧가루 등. 김장을 담그기 위한 재료들이다.

이는 지난 15일부터 17일까지 열린 ‘사할린 동포 돕기 김장행사’의 모습. 그런데 김치 담그기에 여념이 없는 아주머니들 사이에 하얀 ‘주방장 모자’를 쓴 한 남성이 보인다.


지난 16일 경기도 안산의 한 공원에 ‘사할린 동포 돕기 김장행사’를 알리는 현수막이 내걸려 있다.
그는 사할린동포후원회 회장 오창석(58) 씨다. 오 씨는 올해로 다섯 번째 ‘사할린 동포 돕기 김장행사’를 주관하고 있다.

올해 김치 담그기 행사에서는 모두 9000포기의 김장을 했다. 3일씩 세 번에 걸쳐 모두 9일간 이 많은 양의 김치를 담갔다.

동원된 인력은 100여 명. 안산의 새마을부녀회와 참봉사단이 일손을 거들었다.

이 ‘사랑의 김치’는 안산의 고향마을에 거주하고 있는 사할린 동포 489세대에 가구당 20kg씩 나눠줄 예정이다. 그리고 인근 고아원과 양로원 아홉 곳에도 300~500kg씩 제공된다.

배추 9000포기는 모두 오 씨가 손수 농사를 지은 것이다. 농약 한 번 치지 않은 순수 무공해 배추다. 최근 ‘기생충 알 김치’ 파동 때 배추 값이 급등하자 배추를 훔쳐가는 사람까지 있었을 정도로 귀한 배추다.

이처럼 대대적인 김치 담그기 행사를 하기 위해 든 비용은 모두 합해 6000만 원 정도. 이 비용은 오 씨가 사비를 털어 마련한 것이다.

오 씨는 “먼 사할린 땅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가 고국에 돌아온 동포 노인들이 한국에서도 외롭게 여생을 보내고 있다”며 “사할린 동포 노인들이 내가 담근 김치로 밥 한 끼를 맛있게 들 수 있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할린 동포 돕기 김장행사’에서 많은 아주머니들이 김치를 담그고 있다.
안산 고향마을은 사할린 동포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70세 이상의 노인들로, 일제강점기 때 러시아로 강제 징용됐던 이들이다.

이들은 일생의 대부분을 사할린에서 보내고, 2000년 2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정착한 곳이 이곳 고향마을. 처음에는 971명이 함께 살았지만, 지금은 841명만이 남았다. 그동안 130명이 눈을 감았다.

오 씨가 사할린 동포 노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바로 이들 130명의 죽음이었다. 안산에서 장례식장을 운영하고 있는 오 씨에게 피붙이 하나 없는 동포 노인들의 외로운 죽음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졌던 것이다.

사할린 동포 노인들은 장례식은커녕 수의조차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이를 보다 못한 오 씨는 이들을 위해 무료 장례를 치러주기 시작했다. 노인들에게 수입을 입혀주고 직접 염을 했다. 외로운 노인들에게 자식 노릇을 한 셈이다.

오 씨는 “평생 고국을 그리워하다가 막상 한국에 온 지 한두 달 만에 고인이 되는 분들을 보니 너무 가슴이 아팠다”며 “조금이나마 마지막 가는 길을 돕고자 하다 보니 장례를 치러주게 됐다”고 말했다.

이같이 결코 적다고는 말할 수 없는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오 씨는 종종 주위에서 돈이 무척 많아 그 돈을 기부하는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오 씨의 형편은 넉넉지 않다. 그는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인 집에서 아내와 자녀 4명과 함께 살고 있다. 그는 늘 하얀 고무신만 신고 다닐 정도로 가난에 익숙하다.

이런 형편에도 불구하고 오 씨가 남을 돕는 데는 돈을 아끼지 않은 것은 ‘1만 원이 생기면 1만 1000원을 봉사하는 데 써야 한다’는 그 자신의 고집, 또는 철학 때문이라고 한다.


사할린 동포를 돕기 위해 다양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오창석 씨. 16일 그는 동포 노인들을 위한 김장을 하기 위해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바쁘게 일했다.
오 씨는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 씨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사망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를 한국에 버려둔 채 일본으로 떠났다.

어린 나이에 홀로 한국에 남게 된 오 씨는 거지, 건달, 노숙자 생활을 하며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간신히 유년시절과 성장기를 보냈다.

당연히 공부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오 씨의 학력은 초등학교 4학년 중퇴다. 그는 “어렸을 때 힘든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어려운 이웃들이 남 같지 않다”며 “배고파 본 사람이 배고픈 사람 심정을 더 잘 아는 법”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는 사할린 동포들을 돕기 전에도 여러 가지 봉사활동을 해왔다. 주위 사람들은 그를 두고 “삶 자체가 봉사인 사람”이라고 말할 정도다.

오 씨는 무의탁 노인을 위한 시설을 운영하기도 했었고, 음성 꽃동네에 수년 동안 모두 900여 벌의 수의를 무료로 제공하기도 했다.

지난 97년에는 신장 질환을 앓고 있던 생면부지의 고등학생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해 한 생명을 살렸다. 오 씨는 또 장기기증운동본부에 간과 골수를 기증하겠다는 신청도 해 놓은 상태다.

이런 오 씨의 삶을 지켜보는 가족의 마음은 편할 날이 없다. 오 씨의 장녀 영미(29) 씨는 “솔직히 불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라면서 “아버지 자신도 힘들 텐데 남의 일까지 다 떠안고 고생하는 모습을 보면 속상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영미 씨는 “그렇지만 아버지의 봉사하는 삶을 보면서 가족들도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봉사활동에 참여하게 됐다”며 “지금은 가족 모두 아버지의 봉사활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고 덧붙였다.

오 씨는 최근 그가 회장을 맡고 있는 사할린동포후원회를 사단법인으로 만드는 데 힘을 쏟고 있다. 후원회를 사단법인화 해야 정부에 더 강력하게 사할린 동포 지원 정책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 씨는 “아직까지 사할린 동포를 지원하는 제도가 없어 동포들이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지금 사할린 동포를 지원하는 법안이 국회에 상정된 상태인데 꼭 통과돼서 사할린 동포 지원 대책이 마련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앞으로도 아픈 과거를 딛고 고향 땅을 찾은 사할린 동포를 돕는 후원회를 체계적으로 운영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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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Posted by 신효정
재소자에게 보낸 수천 통 편지…“결국 나를 변하게 해”
8년째 감옥으로 편지 쓰는 사람 강지원 인터뷰, “편견 버리고 그들을 바라보세요”
미디어다음 / 신효정 프리랜서 기자
“재소자들도 알고 보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에요. 편견을 버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봤으면 합니다.”

지난주 미디어다음과 만난 ‘편지 쓰는 사람들’(편쓰사, www.letterpeoples.com) 대표 강지원(37, 여, 사진) 씨는 재소자들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편견이 섭섭한 듯 이같이 말했다.

언뜻 연약해 보이는 몸에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강 씨지만 사람들이 재소자들에게 근거 없는 오해를 품고 있는 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이처럼 강 씨는 재소자들을 ‘편애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도 그럴 만했다. 강 씨가 재소자들을 벗 삼아 보낸 시간이 어느덧 8년.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강 씨와 재소자들을 이어준 다리는 한 장의 편지. 강 씨가 교도소 담장 너머로 띄워 보낸 편지의 수는 강 씨 자신조차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아마 수천 통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편지 때문에 재소자와 함께 웃고 울어본 때도 수십 차례다. 이같이 재소자들과 남다른 인연을 맺으며 살아왔지만 사실 그 시작이 그다지 특별하지는 않았다고 강 씨는 말한다.

재소자와 이어준 다리, 한 장의 편지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삶으로…
올해 초 한 재소자가 ‘편쓰사’ 회원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 편지지 30장을 이어 붙였다. 당시 재소자는 하루에 세 통밖에 편지를 쓸 수 없는 교도소 내부 규칙이 사라지자 기쁜 마음에 긴 편지를 썼다고 한다. [사진=편쓰사]
“1998년부터 갑자기 건강이 안 좋아졌어요. 그러다보니 자주 누워있게 됐고,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됐죠. 그러다가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결심을 했어요.”

지금과는 다른 삶. 강 씨에게 그것은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타인을 함께 보듬는 삶을 의미했다. 오로지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삶으로, 강 씨는 번쩍 자신의 삶을 ‘들어’ 옮겼다.

이런 강 씨가 외로운 사람들에게 편지 쓰는 일을 자신의 일로 택한 것은 그야말로 강 씨다운 결정이었다. 그는 이 일이 여러 봉사활동 중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또 편지 쓰기라면 자신의 적성과 꼭 맞는 일이라는 자신감도 있었다. 그래서 조금은 과감하게 강 씨는 자신의 결심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한 잡지에 ‘편지를 보내드립니다’라는 ‘이상한’ 광고를 냈다.

“물질적으로 하는 봉사보다도 마음이 외롭고 지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잡지에 광고를 냈는데, 의외로 재소자 분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죠.”

물론 강 씨에게도 처음 재소자에게 편지를 보낼 때 막연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면 이 사람에게 어떻게 들릴까. 과연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이 사람들도 공감할까.”

하지만 다 기우였다. 편지를 주고받으면 주고받을수록 강 씨는 재소자들도 모두 자신과 똑같은 사람이며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그리고 이런 평범한 진실을 깨달아가는 동안 강 씨에게 배달돼 오는 편지는 점점 늘어만 갔다. 어느덧 재소자 100여 명이 강 씨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었던 것이다.

재소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기우였을 뿐
함께 편지 쓸 사람들 모았지만 재소자 수에 비해 턱없이 부족
‘편지 쓰는 사람들’ 홈페이지 화면. [www.letterpeoples.com]
“아무래도 혼자서는 100여 명의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보낼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함께 재소자에게 편지를 쓸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이게 훗날 편쓰사가 됐죠.”

편쓰사의 모든 편지는 개인 주소가 공개되지 않고 사서함만을 통해 전달된다. 편지를 보내는 횟수는 각자 사정에 따라 조절된다. 대개 회원 한 명이 재소자 2명 이상과 연결돼 한 달에 2회 정도 편지를 주고받는다.

하지만 강 씨는 “이 정도 횟수로 편지를 써서는 재소자들의 편지에 원활하게 답장을 하며 모임을 운영해 나가기 힘들 정도”라고 털어놓았다. 또 회원 수도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라고 한다.

편쓰사의 회원 수는 99년 당시 700여 명이었으나 요즘은 200여 명 정도에 불과하다. 강 씨는 인터넷 문화가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자필로 편지를 쓰는 것을 귀찮아하는 탓에 회원 수가 줄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강 씨는 그러나 재소자들의 편지는 나날이 늘어나고만 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재소자들한테서 편지가 많이 올 때는 한 달에 수천 통까지 온다고 한다.

강 씨는 세상은 빠르게 변하지만, 함께 변해가지 못하는 교도소 담장 너머의 재소자들이 안쓰러울 따름이다. 또 일일이 답장을 쓸 수도 없는 형편에 재소자들의 외로움만 더 짙게 느껴져 항상 마음이 무겁다.

세상은 변하지만, 함께 변해가지 못하는 재소자들
누군가 관심 가져준다는 안도감이 재소자 변하게 하는 원동력
“간절히 편지를 기다리는 재소자 분들께는 미안한 마음뿐이에요. 편쓰사 회원들이 일상생활도 포기해가며 편지만 쓰는데도 답장을 못 받는 재소자 분들이 대다수니 정말 안타까워요.”

상황이 이렇다보니 7살과 5살짜리 어린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강 씨에게 육아와 일상생활, 편지 쓰는 일을 병행하는 것은 때때로 버겁게 느껴진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지칠 때는 이 일을 시작한 것을 후회하기도 한다.

“솔직히 말해서 후회를 한 번도 안 해봤다면 거짓말이겠죠. 하루 종일 편지 쓰는 일에만 매달려야 할 때도 많았으니까요. 정말 포기해버리고 싶을 때도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그러나 강 씨가 결코 이 일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은 간절히 편지를 기다리는 재소자들이 편지를 받았을 때 느낄 기쁨과 희망을 가볍게 여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 어딘가에 여전히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이가 있다는 안도감. 이런 작은 안도감이 재소자들로 하여금 꾸준히 자신을 변하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는 게 강 씨의 신념이다.

“입버릇처럼 사는 게 고통스럽다고 하던 한 재소자가 어느 날 세상이 아름답게 보인다는 편지를 보내왔어요. 앞으로 더 진지하게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도 하면서요. 순간 더 열심히 편지를 써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죠.”

강 씨는 요즘 앞으로 활동의 범위를 넓혀 재소자들이 출소 뒤에도 재범을 저지르지 않고 사회에 잘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체계적인 재활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꿈을 키워가고 있다.

재소자들에 대한 꾸준한 관심이 결국 재소자들을 하나둘 변화시켰듯이, 자신만 생각하던 삶에서 타인을 고려하는 삶으로 번쩍 자신을 ‘들어’ 옮긴 뒤 강 씨 자신도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 한 재소자가 ‘편쓰사’ 회원에게 보낸 편지. 이 재소자는 폭력죄로 10년 넘게 수감 생활을 한 뒤 사회로 복귀해 건실하게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10년 넘는 수감생활을 마치고 사회에서 힘겨운 적응기간을 거치고 있는 한 친구가 오랜만에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작은 아파트에서 연고도 없는 소년원 출신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하더군요. 아침마다 자신은 정비기술 학원에 가고, 아이들은 검정고시 학원에 보내느라 정신이 없답니다. 도시락도 4개나 싸야 한다고 했습니다.

친구는 수감 중에 입버릇처럼 하늘이 온통 회색빛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네가 회색 눈을 가졌으니 그렇다”고 말하는 제게 그 친구는 “그러면 너는 파란색 눈을 가졌냐”고 물었습니다. 파란색은 희망이라면서요. 저는 “회색과 파란색 눈을 모두 가지고 있다”고 답했지요. 다만 눈이 회색 눈이 됐을 땐 하늘을 안 보려고 노력한다고 말했습니다. 회색 눈으로 봐야 회색빛 하늘만 보일 테니까요.

친구는 교도소에 있을 때 자주 독방에서 생활했습니다. 제가 아는 것만도 열여섯 차례가 넘지요. 두 달쯤 독방 안에 있으면 친구는 정말 부지런히, 부지런히 편지를 쓰곤 했습니다. 한때는 독방에서 나올 때까지 제 편지를 한두 통 받으려니 생각했었는데, 벌써 30통이나 받았다며 좋아하더군요. 무슨 ‘엄마의 기원’ 같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난 두 달 동안 내가 파란색 눈만 가지고 있었다”고 말해줬던 기억이 납니다.

그 친구가 이제 어엿한 정비사가 돼 있습니다. 정말 당당하고 씩씩하게 사회의 보통 사람들 속에서 자신의 꿈을 이룬 것입니다. 또 함께 지내는 소년원 출신 아이들도 곧 검정고시를 본답니다. 친구가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아이들을 꼭 대학까지 보내 공부시킬 거라고 다짐에 다짐을 했지요. 그 친구가 ‘편쓰사’ 분들에게 전해달랍니다. 편쓰사 가족들이 보내준 사랑, 평생을 바쳐서 보답해드리겠다고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편지 쓰는 사람들 감옥으로 12년째 편지쓰는 안이영씨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고 싶어요” “청년들이 겪는 가난은 ‘상대적 가난’”
[카페] 편지쓰는사람들
Reported by 신효정 (http://topstargirl.com)
Posted by 신효정